서당에서의 책거리 추억
나는 단기 4285년 (서기 1952년) 3. 25.일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 당시 중학교 진학을 바로 하지 못했었다.
우리가족은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고향에서 농사를 짖고
살았으며,일본에서 귀국시 이삿짐을 연락선으로 붙쳤지만 공습으로 소실
되어 찾지 못했으며,가족은 많고 농토가 없어 소작농으로서 아버지께서
부지런히 농사 지으시면서 어렵게 생활하셨다. 집안의 대농과 소 배내기
(송아지를 가져와 길러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자기 몫으로 키우고 어미
소는 주인에게돌려주는 관례:그 시절에는 소 없이는 농사를 짖지못했다)
등으로 농사 지었으며 식 생활은 양식이 부족하면 지주의 농토를 임대해
농사를 짖기도 하고 춘궁기가 되면 가족의 양식 때문에 장이(10되)
장이 내면 그해 가을에 농사를 지어 13되-15되 더 붙혀주었다.
[30%-50%)지주의 착취에 가깝다) 내어 식생활을해결을했었다.
흉년이 되면 가족이 많은 가정에서는 더욱 몸살을 앓으셨다.
그 후 농지개혁으로 소작인이 상환금을 납부한 후 소작인의 소유가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잠시도 쉬지 않으셨으며 그 후 부지런히 노력하여 농토와
전.답을 마련하셔서 우리는 보다 낳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 중하교 진학은 어려웠고 객지로 하숙이나 자취 생활하며 공부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부유하거나 가정형편이 좋아 능력이있는 가정의
자제들은 진주나 마산등 연고 있는 도시의 상급학교 진학 했었다.
진학한 친구들이부럽기도 했다.그때의 입시제도는 학교별로 입학시험을 실시
하여 입학생을 선발했다.입학자금과 생활비는 농촌에 계시는 부모님들께서
전.답 매매나 곡식.가축(소.돼지등)을 팔아 학자금 조달했던 기억이 난다.
진학하여 교복과 교모쓰고 다니는 모습이 무척 부럽기도 했었다.
마음의 상처는 잊지만? 어린 마음에 공부하고 싶은 마음뿐이 였었다.
아버지께서는 더 자라서 다른 방향으로 사회 진출길을 자주 이야기하시곤
하시면서 달래 주셨던 생각이 납니다. (점원.공장.급사 취직 등)
그러나 계속 학교 가야겠다는 마음은 항상 도사리고 있었으며 3년간 몸부림도
쳤고,농번기가 되면 아버지 따라 함께 묘도 심고,소도 먹이고,풀도 베고,
지개지고 산에 가서 나무도 하고, 초 겨울까지 소나무 밑에 겨울 연료로 쓸
“갈비( 말라 떨어져 있는 소나무 잎 등)”도 가꾸리 (삼지발로 된 대나무로 만든
ㄱ자로 된 연장)로 굵어모아 지개에 지고 집에 와서 집마당 한 구석에 쌓아두고
겨울용 연료로 사용 했었다. 지나는 사람마다 이를 보고 좋은 이야기를 한것
같이 생각됩니다.어느날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께서 (봉건적 사고의 유교
집안이 였으나 신식[현대식]교육을 받아 공직, 금융 계통에 근무하시는
분도 많았다)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마을에 있는
서당에 아침 일찍 함께 데리고가셨다.이것은 공부하라는 배려였다고
생각됩니다.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신언서판
(身言書判):“[ 身 몸신, 言 말씀 언, 書 글서, 判 판가름할 판]중국 당나라
때부터의 인재선발의 기준. 생김새(외모,옷차림), 말(말씨,언변), 문장력
(글씨,문장력), 판단력(판단력,논리력) 몸(體貌), 말씨(言辯), 글씨(筆跡),
판단(文理”)을 말함.” “주경야독(晝耕夜讀):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공부한다)”이란 말씀을 자주 하셨읍니다.
서당 훈장님은 근엄하신 “박훈장님”이 셨습니다.
한 마을에 살고 있어 집안을 잘 알고 계셨던 터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많은 동네 형님들이 크게 소리내어 읽어가며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였읍니다.
훈장님께서 저를 맞고 “동몽선습(童蒙先習)”교재를 주시면서 공부토록 해
주셨읍니다.이때가 아마12살 때 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길지는 않았지만
서당이라는 곳을 찾게된 동기입니다.그때 암송했던 동몽선습의
첫 구절이 기억나서 적어 봅니다.
“天地之間萬物之中에 惟人이 最貴하니 所貴乎人者는 以其有五倫也라.
천지지간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하니 소귀호인자는 이기유오륜야라.
하늘과 땅 사이, 만물 가운데에 오직 사람이란 것이 가장 귀하니,
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음으로써 이니라.
是故로 孟子曰, 父子有親하며 君臣有義하며 夫婦有別하며 長幼有序하며
시고로 맹자왈, 부자유친하며 군신유의하며 부부유별하며 장유유서하며
朋友有信이라 하시니
붕우유신이라 하시니
이런 고로(그러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아버지와 자식은 친함이 있어야 하며
임금과 신하는 옳음이 있어야 하며, 남편과 아내는 분별이 있어야 하며,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 벗과 벗(친구와 친구)은
믿음이 있어야 하느니라 하시니
人而不知有五常이면 則其違禽獸不遠矣니라.
인이부지유오상이면 즉기위금수불원의 니라
사람이 다섯가지 법이 있는것을 알지 아니하고 그것을 어기는 즉시
금수와 멀지않게 될 것이니라.(금수와 같다)
然則 父慈子孝하며 君義臣忠하며 夫和婦順하며 兄友弟恭하며 朋友輔仁然後
연즉 부자자효하며 군의신충하며 부화부순하며 형우제공하며 붕우보인연후
에야 方可謂之人矣니라.?
에야 방가위지인의니라
그러한즉, 아버지는 자비롭고, 자식은 효도하며, 임금은 의롭고,
신하는충성되며, 남편은 화평하고, 아내는 유순하며,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벗과 벗은 어진인으로써
서로 도운 연후에야 바야흐로 사람이라 할 수 있느니라.
전인교육 및 덕성교육 내용이겠지요?
나는 서당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서당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일 (소먹이고,풀베고,나무하고,
아버지따라 밭에도 가서 김도 메고)하며 밤에는 배운 공부를 열심히
음독하고 외웠습니다. 이게 하루 일과였읍니다.
서당교육은 강독(講讀:<천자문>부터 시작,단자(單子)를 붙혀 음독 (音讀)
하는 법을 배운 뒤<동몽선습><명심보감>등을 통해 구두(句讀)와 문장의
뜻을 해독). 제술(製述:글짓기[오언절구.칠연절구.사율등을 짓는것])
습자(習字:글쓰기[해서(楷書)위주로 학습,행서.초서등으로 익힘])
3가지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음독(音讀)위주로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강(講)의 주된 것으로 양다리를 편하게 바르게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강독(講讀:책을 읽고 그 내용을 해석) 하며,훈장께서 여러번
따라 읽게 하고, 그 뜻을 해석합니다.이러한 방법으로 공부하게 되며,다음날
아침 이미 배운 글은 소리 높혀 읽고 그 뜻을 질의응답 하는 전통적인 교수
방법인“강(講)”은 일대일 대면 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수업이 이루워 졌습니다.
그러므로 학동의 실력에 맞게 범위를 정하여 배우며 그 날 학습한 것은
그 이틑날 암송 낭독하여 합격한 다음에 새로운 학습 진도로 나가게 됩니다.
학동의 능력에 따라 진도가 다르고 만일 암송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학업성취도가
달성될 때 까지 학습 진로가 달라지게 되며n 또한 모든 서생이능력에 따라
제각기 범위와 다른 교재로서 배우게되므로 각기 배운 다른 음독의 큰 소리가
서당의 모습을 주위에 보여 주기도합니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학동이 책 한권을 다 암송하여 떼었을 때 학동에게나
그 부모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였읍니다.
훈장님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대접하고 학동의 공부를 격려하기 위한
것으로 반드시 송편을 장만 했으며 송편은 팥이나 콩. 깨등의 소를 넣는 떡이므로
학동의 문리(文理)가 그렇게 뜷리라는 뜻이랍니다.스승과 함께
글 공부하는 동무들에게 “책거리 (책씻이,세책례[洗冊禮])”를 합니다.
나는 동몽선습을 배우게 된지 한 달만에 다 배우고 암송하여 떼었읍니다.
어머니께서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빚어주신 송편, 떡, 바구니와 집에서 손수
담그신 노란 청주 한병을 주시면서 스승에게 예를 갗추고 한잔 딸아 올린 뒤
대접하고 서당 학동들에게 나눠어 먹으라고 일러 주셔서 이를 서당에 가져가
훈장님께 감사하다는 뜻으로 예를 올리고 대접하며 학동들에게도 나눠어
먹으며 책거리를 했읍니다. 다른 학동들도 모두 그렇게 해서 책거리를
했었읍니다. 그 다음 명심보감 (明心寶鑑) 성심편 하 (誠心編下)공부하다가
학교관계 때문에 부산으로 제2의 꿈을 안고 떠나게 됨에 따라 3개월 만에
서당에서 하던 한문공부를 끝내게 되었읍니다.
서당의 문턱을 넘어 보았다는 부듯함이 지금도 느껴지기도 합니다
명심보감 계선편(繼善篇)첫 구절이 생각납니다. 잊혀지지도 않는군요.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자왈 위선자는 천보지이복하고 위불선자는 천보지이화니라
착한일을 한자는 하늘에서 복으로 갚아 주고,
착한일을 행하지 않은자는
하늘에서 화로 갚아준다는 뜻이다.?
훈장님께서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읍니다. 어릴 때라서
서당에 다니던 일은 기억에 남아 있지만 서당의 짧은
기간 동안에 있었던 내용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열심히 배우고 익혔을 뿐입니다.
그때 겪었던 책거리에 대해 기억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런 하늘천(天).따지(地). 누를황(黃)...하고
크게 음독하던 옛날의 서당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도심의 문화회관이나 각 지역의
향교에서 열리는 변화된 서당에서 인성교육 위주로 운영될뿐이며
경남 하동 청학동 서당 등에서 훈장자영서당
(訓長自營書堂:훈장 자신이 생계를 위해 스스로 설립한 서당) 식으로
옛날과 현재 교육을 접목시켜 운영되고 있을 따름이다.
당국의 교육정책에 따라 한문 교육이 교과과정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한문 교육이 부활되기도 했지만 나로서는 서당의 짧은
교육기간이 였으나 학교에서의 한문 시간이나
사회생활에서 많은 보탬이 되기도 했다.
학교 행정실에서 근무할 때 학생이 우리 반 책거리란
떡을 가져 왔을 때, 그때의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었다.
지금 학교에서나 학원 사회단체 등에서 변화된 책거리 행사가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수박.떡.과자,주류.음식등으로
대접하는 변화된 책거리 문화가 그 맥을 유지되고 있음은 다행한
우리 문화의 일부분이다.두서없이 쓴 내용이 흩터러져 있으나
잘 정리가 안된 것 같이 느껴진다.
서당과 책거리란 단어에 관심을 갖게되고,
짧게 지낸 그 때의 서당과
책거리가 추억이기도 합니다.
고:국립국어원 질의
답변: “ 책씻이”.“책거리”라고 합니다.
글방 따위에서 학생이 책 한권을 다 읽어 떼거나 다베껴 쓰고
난 뒤에 선생과 동료에게 한턱 내는 일:“책거리”“책씻이”“책례”
“洗冊禮”라고 한다.요즘와서 “책씻이”를 “책거리”라고 하는것은
적당한 사용이다.
“소배내기” 소를 장만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소배내기'라는 풍습이었다.
새끼소를 가져다 잘 키워 어미소가 되고 다시 새끼를 낳으면
어미소를 주인에게 주고 새끼소를 갖는다.
이렇게 해서 송아지를 장만해 잘 길러서 농사를 지었다.
이런 방식으로 소를 갖는 것을 '소배내기'라고 한다.
이 게시글은 2006년 11.13. 불로그에 게시했던 게시물을필자가 재 편집해 등재한 게시물입니다.(joolychoi)
[淸岡書堂(청강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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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청학동의 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