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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농암(籠巖)최낙인 시인방(1.2 시집)

삼 전 도 비(三田渡碑)/籠巖 최낙인

by joolychoi 2014. 10. 20.

 

 

 

 

  

         

  삼 전 도 비(三田渡碑)/籠巖 최낙인 
 
 
현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289-3에 조용히 서 있는 조선 왕조
제16대 인조대왕 17년(1637년0 12월 1일 높이 3.95m, 폭
1.4m로 제작된 사적 제101호인 산전도비
 
후덥지끈한 여름 날씨, 간간히 내리는 궂은 비 맞으며 골목길
주택가 한구석에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그 비를 찾았다.
 
세 차례나 옮겨 이 자리에 숨어 든 없어야 할 그 역사
앞에서니 치욕의 모멸감에 끊어 오르는 울분을 못내
참을 수없어 머리에도 가슴에도 마구 치솟는 분통의
눈물을 차마 저어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끌려나온 평복 차림의 인조대왕
수항단 높은 곳에 항복을 재촉하는 황금 두른 청 태종에게
한 번 절하고 세 번 땅바닥에 머리 찧는 삼배구고두(三拜
九叩頭)란 굴욕의 의식으로 조국의 운명과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7년 임란의 전화 속에 폐허와 상처로 얼룩진 조국 강토는
채 40년이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정신적 패망까지 겹쳤으니
이를 지켜본 백성들의 통곡과 그 원성은 하늘에 닿고도 남았다.
 
이미 국력은 기울었고 병력은 거덜나 민심은 흉흉하기만
한데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주화파. 적화파로 실의 없는
명분 싸움판인데 그래도 불모를 자청하여 나선 소현세자의
우국충절은 한줄기 빛이었다.
 
오랑캐롸 얕보던 그들에게 군신 관계의 예를 바치고도 모자라
금은보화, 날렵한 군마.귀여운 처녀들까지 마구 징발하여 갔고
어쩌다 운 좋게 되찾아온 우리의 딸들은 환향녀(還鄕女)라 불렀다.
 
항복을 고한 바로 그 나루터에 몽골어, 만주어, 한문으로
새겨진 대청태종공덕비(大淸太宗功德碑)란 그 우렁찬
비석을 지켜본 우리네 선조들은 심장의 피가 거꾸로
치솟았을 것이고 망연자실한 통곡의 피눈물에 우리의
젖줄 한강은 통한의 핏빛 뿌리며 흘러흘러 갔을 것이다.
 
내가 내 발로 애써 이곳을 찾아온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원한의 비가 우리에게 내리는 진정한 교훈이 무엇인가?
만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왜 이렇게 가슴은 쥐어짜듯
떨리기만 하는가?
국권을 강탈당한 한일합방과 동족상잔의 6.25가
또 뇌리에 박힌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쓰레기더미에서
장미 피기를 기대하는 게 낫다고 일컬어지던 그 초라했던
나라가 사상 최단기간 내에 산업화, 미주화로 빛나는
동방의 등불이 된 조국이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 아닌가 ?
 
그런데 어이없게도 뒷걸음치고 있는
우리의 서글픈 현실은 또어떤가 ?
국회는 난장판이고, 노동 현장은 아수라장이며,
시민의 광장은 난동장이 아닌가 ?
 
현명한 백성은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어리석은 백성은
체험을 통하여 배운다는 그 진리가 삼전도비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진정한 반면교사의
교훈이 아니겠는가 ?
 
--최낙인 시집<“엉겅퀴”제7부祖國>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