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는 "남들은 집도 좁은데 무슨 사진을 이렇게 많이 걸어놓았느
냐고 할지 모르지만 내겐 든든한 사진"이라며 "남들 보기에
우리 가족이 어딘가 모자라 보이지만, 우리는 서로 모자란
걸 채우면서 산다"고 말했다.
정씨 가족의 행복 원칙은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서로 도와주는
것'이다. 결혼 전, 정씨는 나이 많고 치매 걸린 어머니까지 모신
가난한 레미콘 운전사였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논과 집을
모두 날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치매 걸린 노모를 홀로 모시며
빚을 갚다 보니 나이 쉰이 됐다. '나이', '가난' 그리고
'치매 걸린 어머니'는 정씨에게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었다.
그런 정씨를 위로한 건 단아씨였다. 정씨는 필리핀 아내를 둔
친구와 함께 필리핀에 갔다가 단아씨를 만났다. 정씨는 단아씨에게
"현재 치매 걸린 어머니를 요양 병원에 보낸 상태다"라고 털어놨다.
싫은 기색을 비칠 줄 알았던 단아씨는 오히려 "난 대가족 사이에서
자라 어른을 잘 모실 수 있으니 어머니를 함께 모시자"고 말했다.
가난하단 말엔 "내가 영어를 잘하니 한국어를 배우면
영어 선생님으로 함께 일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해 봄, 부부는 결혼해서 한국에 왔다.
단아씨가 한국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요양병원에서 모셔온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들을 찾겠다'며
온 동네를 맨발로 돌아다닐 때도 있었다. 거동을 전혀 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뒤엔 단아씨가 대·소변까지 모두 받아냈다.
그래도 단아씨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시어머니가 먹고
싶단 음식은 동네 사람에게 만드는 법을 물어 만들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든 시어머니에게 혹시라도 욕창이라도 생길까,
더운 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도 단아씨를 '우리 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7년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시어머니는
단아씨에게 "고맙다 내 딸"이란 말을 남겼다.
단아씨가 가지고 있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란 약점은 남편 정씨가
극복할 수 있게 도와줬다. 정씨는 "한번은 아내에게 '이 바보야'라고
했는데,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화를
내더라"고 했다. '바보'를 굉장히 심한 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단아씨는 "밤이면 고향이 그리워서 울었다"고 말했다.
남편 정씨는 단아씨를 김제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데려가
한글을 배우도록 권했다. 단아씨가 어려워하는 발음은 직접
녹음을 해 들려줬다. 단아씨는 그 녹음테이프를 많게는
1000번까지 들으면서 한글을 깨쳤다.
한글을 배우면서 공부에 재미를 붙인 아내가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도운 것도 남편 정씨다. 정씨는 "(영어를 잘하는) 능력을
살려보라"고 전주대 영어교육과 석사과정 진학을 적극 추천했다.
단아씨는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할 정도로 성적이 뛰어났다.
단아씨는 졸업 후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선생님이 됐다.
이후 단아씨의 가장 든든한 지원자는 아이들이다. 남매는 혹시라도
단아씨가 집에 늦게 오는 날이면 전기장판 코드를 꽂아 집을
따뜻하게 데워 놓는다. 엄마가 수업을 끝내고 오면 아이들이
단아씨의 팔·다리도 주물러준다. "우리 가족은 수퍼 가족이야."
정씨 부부의 아이들이 동네 사람에게 하는 자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