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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 치환(致煥 26世)-하림(夏林 26世) [36]

by joolychoi 2013. 1. 4.

 

 

 

  

세덕총람 (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 인  물(人 物)-[36]  
ㅇ치환(致煥 26世)
보명(譜名)은 치림(致林)이고 호는 금암(錦巖)인데 남해군 상동면 봉화리 내산마을
에서 태어 닜다. 어릴때 부터 어머니 연안 차씨(延安車氏)의 곡전지연(穀田之燕:곡식
밭의 제비처럼 남에게 유익함을 주는 사람이 되라.)의 교훈을 명심하고 자랐다.
일찍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만주신경(滿洲新京)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8.15
해방이 되자 좌. 우익으로 분열된 혼란기에 치안이 급선무임을 통감하고 경위(
警衛)로 부산 철도 경찰학교 교관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 딛고 타고난 성실성과
뛰어난 능력으로 곧 부산경찰서 경바주임, 경무부 공안국 경비과. 영동지구야전
사령관 참모, 경감 승진후, 제주도 4.3사태 특별부대 사령부 작전참모,총경으로
승진되어 지리산지구공비토벌전투경찰대 총사령관으로 파견되어 이들을 소탕
시키고, 내무부 치안국 작전계장으로 전임 중 6.25 사변이 일어나자 파죽지세로
밀려 오는 적군을 맞아 대구지구 방위사령관으로 낙동강 최후 방어선 확보에
수훈을 세웠다.서남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10만 여명의 소탕
작전을 지휘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자 남원지구 주민들이 공의 공적비를
광한루 경내에 세워 감사의 정을 표하였다.
 
1952년에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시건주립대학에서 경찰 행정학을 수학하고
미국 각주를 순방하면서 경찰 제도를 견학하고 귀국하여 내무부 치안국 경무과장에
전임된 후, 1954년 경남, 전북, 충북, 경남경찰국장에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사관 승진으로 34살에 최연소 나이에 서울시경국장으로 전임되어 경찰현대화와
민주경찰, 예방 경찰제를 확립하고「최고의 이념을 위해 최저의 길을 가겠다. 」고
다짐하여 방범순찰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112 범죄신고 전화를 창설하였다.
1960년 4.19이후 고향 남해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3.15 부정선거당시
대통령 비서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공민권제한법의 소급적용을 받았는데
5.16 군사혁명으로국회 해산에 따라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조선일보 상담역과 국제신문협회 총회 대표로23개국을 순방하였다.
1963년에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공천으로 남해에서 출마. 당선되어
국제의원연맹(I.P.U) 한국대표로 활동하고 1964년-1970년까지 제27대-제30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축구의 국기화(國技化)와 아시아의 왕좌(王座
탈환을 2대 목표로 삼고 의욕적으로 축구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아세아
청소년축구대회를 계기로 서울 동대문 운동장에 야간 조명시설을 설치하였으며
1969년 제2회 킹스컵 대회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1965년 민주공화당 당무
위원일 때 남해대교 건설을 추진하여 1973년에 준공시켜 동양 죄대의 현수교로
관광 명물을 만들었다.이 대교를 두고「최치환 다리! 박대통령 다리! 」의
노래가 생겼다.국회 조사위원장과 아세아의원연맹(I.P.U) 3차 총회에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여 정치분과 위원장과 3차 총회 부의장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1967년 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제의원연맹 한국대표를 맡았으며 국회 건설
위원장 때는 경부고속도로건설 등 국가 주요 건설과 정책입안에 크게 기여하여
한국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 하였다.대한민국 사회복지연합회 회장을 거치고
1970년-1981년 사이 대한민국 경우회 제3대-제6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경우회관
건립과 경우신보 발행 그리고 경우장학회를 설립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며
경우회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제8대 국회의원 공천에서탈락하자 1971년 미국 하바드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을
수료 후 귀국하여 경향신문사 대표이사로 사장에 취임하여 "신문의 역할은 뉴스의
전달만이 아니고 그 해결책까지 제시해야 한다."고 밝혀 신문 경영에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73년에는 국제신문협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큰 활동을 하였고,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 한국 동창회장과 경기고등학교 동창회장 및 한국 근로
복지회장 그리고 한국용역경비협회장을 역임하였다. 1978년 각종 모략과 방해를
박차고 유신시대의 마지막 선거에서 제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민정회
상임고문과 국제의원연맹 한국대표, 한일안보협회 한국대표로 유창한 영어,
일어,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그 역할을 원만하게 해냈다. 민주공화당 당무위원을
역임하고 1980년 신군부의 국기비상계엄 하에서 정치규제를 받기도 하였다.
1981년 삼성그룹 상임고문과 1983년 삼성안전시쓰탬(현 애스원)사장 그리고
삼성반도체 사장으로 경기도 수원의 기응 반도체 단지조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1983년 정계에 진출하려하자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 기업도 애국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ㅁ반류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제12대 한국국민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했고 지방 자치제 정착을 제창하였다.
그리고 경찰의 중립화와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다.
상훈으로는 지리산 공비토벌 유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태극무공훈장을 지접
수여하였고 을지무공훈장은 두번 받았으며 미국동성훈장과 미국자유훈장
그리고 소성훈장 등 다수를 받았다.(금암 최치환 일대기)
(주) 최치환(崔致煥):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서산공 최초회의
9세 손이며 최용락 공(崔庸洛公)의 자.
 
ㅇ하림(夏林 26世)
자는 윤약(允若)이고 호는 가수(稼叟)이다.문 행이 있어 대명산(大明山) 아래
집을 짓고 북헌(北軒)에 기문(記文)을 새긴 편액을 걸고 살았다.
유집이 있다.(세헌록)
(주)최하림(崔夏林):충순위공 최윤재(崔潤才)의 후이고 가선공 최낙복(崔洛福)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