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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 東洛25世-震煥25世- 啓洛25世-點煥 25世-洛敏25世-英吉 25世 [34]

by joolychoi 2012. 12. 16.

 

 

  

세덕총람 (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 인  물(人 物)-[34]  
ㅇ동락(東洛 25世)
호는 국천(菊川)으로 해정공 최수강의 후이고 은재공 최명대(崔鳴大)의
7세 손이며 경산공 최한승(崔翰升)의 손이다.
5.16 군사혁명에 참여하였으나 권부의 고관직을 사양하고 농촌의 부흥과 선진화를
위해 농촌진흥청 차장으로 나아가 낙후한 농촌개발 진흥기반 구축에 기여 하였다.
 더구나 60년대의 보리 고개를 극복하는 일환으로 쌀 증산 녹색혁명을 기록하여 굶주림에서 해방시켰던
기수 역활을 하였다. 일찍 군무에는 육균대령으로 화랑무공훈장과 황조소성훈장을 수상한 바있으며
안렴사 공파 서울 종친회 고문으로 종사에도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족보. 옥산회보)
ㅇ진환(震煥 25世)
자는 뢰경(雷卿)이며 호는 소천(小泉)이다. 성격은 침중하고 언행이 반듯하여
주위로 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일찍이 공직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으며
경상남도에서 여러자리를 옮겨가며 지방행정 발전 구현에 이바지 하였다.
공직 말기에는 합천군수를 지내면서 군민의 소득 증대사업과 복지 증진시책을
적극 추진하여 군민들로 부터 선정(善政)의 칭송이 높았다.(족보)
(주)최진환(崔震煥):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심천공 최홍모(崔弘模)의 자
 
ㅇ계락(啓洛 25世)
 자는 효중(孝仲)이고 호는 동록(東鹿)이다. 진주시 지수면에서 태어나서 진주 중.고교와
동아대학교 국문과에 재학학 시에는 뛰어난 두뇌와 올바른 몸 가짐으로 친지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문학에 탁월한 재주가 있어 일찍 진주 경남일보사와 대구 소년세계사
또 대구전선문학사에서 타고난 문예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사우(社友)들은 물론 
독자들로 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부산 국제신문사에서 편집부국장에 발탁되어
근대화 사업 초창기에 국민의식개혁과 국가의 백년대계에 공정한 지표 설정으로
진실성과 사명감, 책임감으로 보도와 논평을 거침없이 피력하였기에
부산시 문화상과 소천아동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불혹(不惑)에 타계하니 사우(社友)들을
비롯하여 문우(文友), 향우(鄕友), 종당(宗黨)에서 매우 애석해 하였다,
시집으로「꽃씨」와 「철둑길의 들판」이 있고 「알프스 산의 소녀」와 「대위의 딸」
그리고 「어린이 세계문학」국역하여 반포(頒布)하였다.
고인의 시비(詩碑)가 세워졌는데 부산지역에는 금강공원에꽃씨」,용두산 공원에
외가 길」, 대신공원에 해 변」, 이기대 공원에 해즈믄 남강」이 있어
"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는다" 는 옛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는 듯 하다.
(최종락)
(주)최계락(崔啓洛):찰방공 최진호의 후이며 좌윤공 최익회(崔益會)의
8세 손이며 최경호공(崔卿鎬公)의 자
 
ㅇ점환(點煥 25世)
자는 주임(主任)이고 호는 노봉(魯鳳)이다. 용모가 맑고  빼어났으며 재질이
총명하여  독학으로 문리,필법을 숙달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재주가 민첨하여 향인들의 추대로 지방의회 의원과 군참사를
역임하고 유림회장과 통영향교 전교(典敎)를 10여년간  역임하여 유림진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통영 서도회장과 통영 충렬사 평의원을 지내면서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엿다.
(주)최점환(崔點煥): 소연공 최게(崔게)의 후이고 송파공 최필학(崔必鶴)의 현손
ㅇ낙민(洛敏 25世)
자는 인백(仁伯)이며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서산공 최처회의 8세손이며
만강공 최우순(崔羽淳)의 손이다.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출생이며 서울데학교 법과대학을 나와 제1회 행정 고시에
합격하였으며 경상북도 법무담당관과 기획담당관을 거쳐 경북의성 군수와
민방위 국장 및 식산국장을 역임하고 내무부 기획담당관과 예산담당관을 지냈다.
중앙부처 근무시 과도한 업무수행으로 건강을 잃어 잠시 낙향하여 부산직할시
통계담당관과 법무담당관 역임 중, 천수를 다하지 못한 채 40대 후반에서 타계하니
친지 동료들로 부터 애석함을 금치 못하였다>(족보)
 
ㅇ영길(英吉 25世)
자는명칠(鳴七)이고 호는 운곡(雲谷)이며 고성군 구만면 주천에서 진주시 사봉면
운곡으로 이사하고 노경에 유연정(油然亭)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회봉 하겸진
(河謙鎭)이 기문을 지었다.
천성이 심후하고 외모는 단정하였으며 마음은 견고하였다.
부친과 형이 독서를 권하면 가난한데 글 읽을 겨를이 없다 하고 농사에 전념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는데, 부모가 별세하자 상례와 제사의 절차가 모두 법도에
맞았다.만년에는 어려운 친척에게 도움을 주고 몇 개의 방을 만들어 자손들의
학업 장소로 제공하고 "모든 일은 근검으로 얻게 되고 교만함으로 잃게 되니
명념하라." 고 일렀다.(세헌록)
(주) 최영길(崔英吉): 충순위공 최윤재(崔潤才)의 후이고 최문찬공(崔文贊公)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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