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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주요인물(主要人物)-13)인물: 洛權25世-洛道- 洛久25世 [33]

by joolychoi 2012. 12. 12.

 

 

  

세덕총람(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   
13) 인  물(人 物)-[33]  
ㅇ낙권(洛權 25世)
공의 자는 영중(榮中)이며 호는 일헌(逸軒)이다.공은 의민공 최균(崔均)의 13세 손이며
만국헌공(晩菊軒公) 최동환(崔東煥)의 증손이고 함묵당공(含默堂公) 최진모(崔振模)의
자이다. 공은 성품이 온후하고 다정다감하여 얼굴에는 언제나 잔잔한 미소가 깃들어
이를 말해 주었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주도 면밀하여 한 치의 그릇됨이 없어서,사람들로
하여금 존경과 칭송을 한 몸에 입었다. 아들 석림공(奭林公)이 국회의원 4선의 영예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의원 자신의 높은 덕망과 뛰어난 정치적 역량에 기인하였겠지만
공께서 선거구에서 불철주야로 군민의 보살핌과 격의 없는 인간관계의 형성도 큰 몫을
한 소산이라 하겠다. 또 종사를 주도하여 쇠락일로의 종중을 회생시켜 종원의 긍지와
관심을 다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이를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 종중의 건실한 터전을
닦아 놓았다.더구나 공의 회감을 맞이하여 아들인 국회의원 석림공(奭林公)을 불러서
"시조 선산이 허물어 질 직전에 있으니 네가 의정에 바쁘겠지만 정성을 다하여 내
회갑연 경비로 수호하도록 하라." 고 하였던 바 부명(父命)을 받들어 치산작업을
비롯하여 봉분을 방문(方墳)의 모습대로 손질하고 방축과 사토를 깨끗하게 한 후,
묘 앞에 비석까지 세웠으니 만고에 많은 자손들이 경모하였다. 그 뿐 아니라 개령
현감공 배위 정경부인 진양정씨의 묘비 개수를 비롯하여 각 처 선영에 놓여진 훼멸
직전의 묘갈 개수 치산에 성력을 다하여 쇠락일로의 종중을 중흥케 하였으니, 이 어찌
그 숭조 독성(崇祖篤誠)을 종인(宗人)들은 물론 향인들의 칭송과
모범의 대상이 되지 않았겠는가 !
 
가을 묘사 때 여러 선영의 비문 끝에 공의 휘 두 글자가 빠진 곳이 없으니,
공의 그 조상에 대한 정성을 우리 모두가 같이 받들고 본 받아야 할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또「일찍 문묘(文廟)에 존성회(尊聖會)를 창설하여 선성(先聖)을 숭모하고 서원을
수리하며 재실을 건립하여 종향(宗鄕)이 칭송하였다.」고 족보에 실려있다.(옥산회보)
ㅇ낙도(洛道 25世)
공의 자는 봉래(鳳來)이고 호는 만산(晩山)이다.1900년 경자셍으로 입죽곡조(入竹谷祖)
인 진사공 최세강(崔世康)의 12세 손이다. 어려서 남악서원에 입문하여 평생을 인간
본연의 도리를 제시한 성리학을 탐구하고, 만년에는 만산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1960년 경자에 시조 문성공 묘역 내에 세도가의 유골이 투장됨에 이를
파묘할 종의(宗意)가 모아져서 이에 공이 흔쾌히 앞장서고 족장 유호(有鎬)공과
동행하여1962년 10월 어느 날 성묘객을 가장하여 낮에 투장을 확인한 후 밤중에
파묘한 후 "백골을 찾으려면 구만 도산재로 오라."는 쪽지를 남기고 백골을 지니고
돌아왔으니,공의 춘추 이미 진갑을 지냈고 유호(有鎬)공도 고희(古稀)를 앞둔
노구였으나 청장년도 할 수 없는 일을 성사시킨 그 용단에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공의 보주(譜注)에는「 시조 묘역 정화 유공」이라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진사공파 개요)
 
ㅇ낙구(洛久 25世)
자는 사징(士徵)이며 호는 성암(省菴)이다. 일찍 구만면장을 거쳐 이사관(理事官)으로
승진하여 문교부 편수국장. 국립과학관장.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고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홍조소성 훈장과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안렴사공 서울 종친회장을
역임하면서 전주최씨 안렴사공파 세헌(世獻)을 국역 발행하고 1998년 안렴사공파
족보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족보 4권을 발간하면서 한글화하여 읽기기 쉽게
하였다. 공직 퇴임 후 고향인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육이재(六怡齋) 옛 집터에 집을
세워 조부의 아호(雅號)를 따서 도남재(道南齋)라 편액하고. 이 집에서 기거하면서
조부의 글을 읽고 아질배(兒姪輩)의 귀향시 유숙(留宿)케 하였다.
 
그리고 양양재(洋洋齋)를 세워 사방에 산거한 자손들이 선조의 제청(祭廳)으로 삼았다.
또 육이재 마을 입구에 공과 빈(賓)인 강성 문원근(江城文愿根)공 주관으로 1999년
5월에 "전주최씨 세장(全州崔氏世庄)" 의 비를 세웠는데 이 비에는

「 우리의 조상은 인근 지역 주민과 다정한 교분으로 인심좋고 살기 좋은 평화로운 마을

육이재를 이룩하여 살아 오셨다., 이와 같이 훌륭한 조상의 얼과 세교정신(世交精神)의

통을 이어 받고 기리면서 더욱 발전시켜 천세 만세 번영을 기원하는 뜻에서

전주최씨문중 후예들과 사위들로 조직된 연연계(淵연稧) 계원 일동이

작은 정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라 하였다.(족보, 崔源鎬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