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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스크랩] 다산생가 - 여유당(與猶堂)

by joolychoi 2007. 2. 6.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팔당댐에서 양수대교 쪽으로 여유당(1986년 복원)강변을 끼고 달리다 보면 중앙선의 능내역이 보이고 여기서 계속 외길로 동진하면 [정약용 묘소]라는 안내판이 나붙은 삼거리를 만난다.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1㎞ 남짓 내려가면 강변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가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재(馬峴)다. 당시는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였는데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75의 1번지로 변경되어 있다.

유적지 입구에 들어서면 정면에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이 고졸한 자태로 은근히 나그네를 유혹하지만 정작 발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곳은 여유당의 오른편을 돌아 뒤편 동산의 다산묘소이다. 모진 비바람에도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박한 護石의 보호아래 부인 풍산 홍씨와 함께 조용히 누워 있는 다산 선생은 여유당을 휘감고 도는 한정다산 묘터강의 여유로운 흐름을 관망한다.

여유당이 있는 마재 마을 바로 위쪽이 남한강과 북한강이 서로 만나는 두물머리, 즉 양수리이다. 상공업진흥에 중점을 두고 이용후생론을 강조하는 북학파와 토지제도 등 농업부분 개혁을 강조했던 경세치용학파라는 두 갈래의 실학을 실사구시의 정신에 바탕하여 하나로 집대성한 다산이 두 개의 강이 만나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양수리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막힌 우연처럼 보인다.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보며 동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오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 문도사가 나온다. 국운이 다해가던 1910년 고종은 7월 정이품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을 추증(追贈)하고 문도공(文度公)이라는 시호를 내리는데 그 뜻은 박학다식하니 文이요, 마음이 뜻을 제압할 수 있으니(心能制意) 度라 하였다. 사필귀정이라 하였던가! 궁핍한 백성들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던 노론 집권층들에 의해 20여 년에 가까운 억울한 유배생활과 정치적으로 불우한 말년을 보낸 다산을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세상은 잊지 않고 기억한 것이다.

문도사를 지나면 왼편으로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이 자리하고 있다. 다산이 사환기(벼슬기)와 유배기간을 제외한 거의 반평생을 보낸 여유당은 1925년 을축 대홍수 때 유실되어 방치되다가 후손들과 몇몇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1986년 복원된 전형적인 조선의 양반집으로 경기도 지정 기념물 7호이다. 병조참의를 지낸 다산의 5대조 정시윤(1646-1713)이 만년에 서자를 포함한 네 아들과 함께 마재로 이사와 여생을 보냈는데 다산의 집은 서자가 살았던 북쪽 집이다. 與猶堂은 다산이 1800년 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기던 집(堂)이다. 여유당이라는 堂號의 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이름이며 猶는 겁이 많은 동물명으로서 사방을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담겨 있다. 외가쪽 玄孫(손자의 손자)인 김성진과 정인보와 안재홍의 주도로 다산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신조선사에서 간행한 154권 76책의 書名 <여유당전서>도 그의 당호 '여유당'에서 빌려 온 것이다. 여유당의 사랑방에서 남녘의 제자들이 정성스레 보내준 녹차를 손수 끊여주며 시대의 지식인들이 가야할 길을 향기로운 茶香에 실어 은근히 전해주던 다산 선생.

여유당의 주변에는 다산기념관, 다산문화관이 있어 다산의 업적을 기리며, 해마다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출처 : 인왕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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