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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스크랩] 다산의 주변

by joolychoi 2007. 2. 6.

다산의 주변 - 다산의 선조

다산은 영조 38년(1762) 6월 16일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과 어머니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주 정씨는 처음 본관을 압해(押海)로 하였으나 영조 때 나주로 본관을 바꾸었다. 시조(始祖) 고려 검교대장군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6세(六世) 공일(公逸)까지 압해도에 거주하였고 7세(七世) 원보(元甫)가 황해도 덕수(德水)로 이거하였다.

시조 이하 6세의 분묘는 압해도에 있었으나 고려말 압해도가 왜구의 침탈로 실토(失土)됨에 따라 실전(?)되었다고 한다. 압해도는 본래 군치(郡治)의 섬으로 박씨, 정씨, 주씨, 홍씨 등이 본거지로 하였으나 고려조에 현치(縣治)로 하였다가 현이 없어지고 나주에 소속되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빼앗겼던 비운의 섬으로 지금은 행정구역이 신안군 압해면이다.

다산이 1822년 회갑을 맞아 스스로 지은 묘지명(자찬묘지명)에 의하면 다산의 선조들은 8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들었다. 처음으로 벼슬한 선조는 홍문관 校理를 지낸 자급(子伋-11世)이다. 그때부터 이어져 부제학을 지낸 수강(壽崗-12世), 병조판서를 지낸 옥형(玉亨-13世), 좌찬성을 지낸 응두(應斗-14世), 대사헌을 지낸 윤복(胤福-15世), 관찰사를 지낸 호선(好善-16世), 교리를 지낸 언벽(彦璧-17世), 병조참의를 지낸 시윤(時潤-18世)이 모두 당대의 선비들이 선망하던 옥당에 들었다.

옥당은 궁중의 서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홍문관의 별칭으로 당대에 글 잘하던 선비들이 임명되었으며 임금에게 경론(經論)을 강연하던 관직도 겸하였다. 역대 문과급제자들의 명부인 <국조문과방목 國朝文科榜目>에도 옥당에 임명된 급제자들의 이름 위에는 그 사실이 따로 표시될 정도로 옥당에 드는 것을 개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하지만 병조참의를 역임했던 다산의 5대조 丁時潤(1646-1713)이 만년에 마현(馬峴)으로 이주한 이후 고조 · 증조 · 조부의 3대에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숙종 이후 극심해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권력을 잃은 남인이 겪는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載遠) 때에 와서야 정조(正祖)의 즉위로 남인계에 벼슬길이 트이자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고 선조의 공훈이나 특별한 배려로 임명되던 제도인 음사(蔭仕)로 진주목사까지 역임했다.
 

출처 : 인왕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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