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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스크랩] 아버지로서의 다산

by joolychoi 2007. 2. 6.
폐족의 설움을 안고사는 다산의 어린 자식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유배가던 아버지를 전송하던 세 살짜리 막내아들을 뒤로하고 천리 길 전라도 강진 땅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큰아버지(약전)와 함께 유배를 떠나고 약종 백부는 대역죄인으로 참수당하니 어린 나이의 자식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사건이었다. 각각 19살, 16살로 한참 과거준비에 열중할 나이였던 다산의 두아들 학연과 학가에게 큰아버지의 '대역죄인' 소식은 마른 하늘에 뜬금없는 날벼락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큰아버지의 죽음도 슬픈 일인데 이제 과거까지 볼 수 없으니 얼마나 낙심하였을 것인가? 당시 대역죄인의 집안은 과거를 볼 수 없는 것이 국가의 법률이었다.
이런 두 아들의 심정을 헤아린 다산은 유배지에서 편지를 보낸다.
절대로 좌절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여 책읽기에 힘써라. 출세길이 막힌 폐족이 글도 못하고 예절도 갖추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느냐. 보통 집안 사람들보다 백배 천배 열심히 공부해야 겨우 몇 사람 노릇을 하지 않겠느냐. 내 귀양사는 고통이 몹시 크긴 하지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유배간 아버지에게 햇밤을 보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던 아들이었지만 여러 차례 글공부를 재촉하는 아버지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부지런하지는 않았나 보다. 자질은 있지만 게을러 학문에 진척을 보이지 않는 자식들을 걱정하다 병까지 앓으며 노심초사하던 다산은 엄히 꾸짖는 편지를 보낸다
너희 처지가 비록 벼슬길은 막혔다 하더라도 성인이 되는 일이야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문장가가 되는 일이나 넓게 알고 이치에 밝은 선비가 되는 일은 꺼릴 것이 없지 않느냐. ...... 평민이 배우지 않아 못난 사람이 되면 그만이지만 폐족으로서 배우지 않는다면 마침내 비천하고 더러운 신분으로 타락하고 말아 아무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따뜻한 아버지 다산

학문을 게을리하는 아들을 다산은 유배지 강진으로 불러 직접 가르친다. 유배초기 서슬파랗던 관가의 감시가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풀렸다. 이에 다산은 1805년 겨울 유배지를 찾아온 장남 학연과 읍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 함께 묵으며 주역과 예기를 밤낮으로 가르쳤다. 유배 중 네 번의 교정을 거쳐 완성한 <주역>과 함께 <예기>를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말하고 <독례통고 讀禮通考>라는 책을 인편에 보낼 정도로 예에 대한 연구에 각별하였던 다산인지라 아들에게 직접 예기에 대해 강론하였던 것이다. 이 때 예에 대한 학연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기록하여 모아놓았는데 이름하여 스님들이 묵는 암자에서 묻고 답했다하여 <승암문답 僧庵問答>이라 하였다. 유배지를 다산초당으로 옮긴 1808년에는 둘째 아들 학유를 옆에 두고 오경 가운데 <주역>과 <춘추>를 읽도록 하였다.

큰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둘 다 가까이 두고 직접 가르치고 싶지만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며 읽어야 할 책의 순서를 꼼꼼히 적고 있다. 이 외에도 그가 집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옆에서 직접 가르치며 학문의 진척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걱정이 구절 구절마다 깊이 배어있다. 이렇게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하였던 아버지였지만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어린 자식의 죽음에는 한없이 약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외동딸에게는 사내아이와는 또 다른 애틋한 부정을 느낀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향으로부터 기별이 오면 보기도 전에 마음부터 졸인다"고 하였던 다산은 1802년 겨울 네 살짜리 막내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접하고 간장을 쥐어 짜는 서러움이 복받친다고 하며 슬퍼하였다. 귀양살이 떠날 때 과천 점포 앞에서 어머니 품에 안겨 아버지와의 기약없는 이별에 슬퍼하던 그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여 몇 날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리라. 눈 앞에서 네 명의 사내아이와 한 명의 계집아이를 잃었을 때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억지로 스스로를 위로하였으나 유배지에서 듣는 막내의 죽음은 끓어오르는 슬픔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이었다.

"절하는 연습한다 예쁜 모습 보여 주고 / 술잔을 건네주며 웃음 띤 모습 절로 보여 / 오늘같은 단오날 저녁 / 누구 있어 손에 쥔 구슬처럼 사랑하리"하고 어렸을 적 딸아이의 재롱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다산은 어른으로 성장한 딸을 절친한 친구의 아들이자 초당의 제자인 윤창모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애의 친정어머니가 시집올 때 입었던 색바랜 비단 다홍치마 위에 매화와 새를 그리고 애절한 심정을 시로 적어 외동딸에게 선물한다. 아마도 시집간 딸에게 아버지로서 죄인의 몸인 것이 늘 부담스러웠을 것인데 그 미안함을 매조도에 담아 보내지 않았을까?
출처 : 인왕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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