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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스크랩] 백성들의 고통을 치유한 목민관 정약용

by joolychoi 2007. 2. 6.
18세기 후반의 사회상
    갈밭의 젊은 아낙네 울음소리 그지없어 관청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보고 통곡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온 거야 있을 법도 하다지만 예부터 男絶陽은 들어보지 못했어라 시아버지 장례치르고 갓난아긴 젖먹이는데 三代의 이름이 軍籍에 올랐다네 달려가서 호소해도 범같은 문지기 버텨 섰고 里正이 호통치며 남은 소마저 끌고 갔다네 아이 낳은 죄라고 남편이 한탄하더니 칼갈아 들어간 뒤에 방에는 피가 흥건하여라

유배 3년째인 1803년 가을 강진에서 지은 시로 제목 '애절양 哀絶陽'은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한 백성의 사연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슬픈 사연인 즉 이러하다.

갈밭에 사는 한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만에 16살부터 60세의 정상 남자들에게 해당되는 군적(軍籍)에 등록되어 군에 가지 않는 대신 내야하는 일종의 세금인 군포를 물어야 했다. 죽어 백골만 남은 사람과 갖태어난 젖먹이 아기에게 군역을 부과하는 백공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添丁)이 일반화된 시절이었으니 탐관오리에게 부당함을 하소연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라 일찌감치 포기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낼려고 하였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은 결국 소를 빼앗기게 한다. 농사꾼에게 어쩌면 자식보다 소중한 소를 빼앗긴 힘없는 백성은 모든 것이 아이를 낳게 한 자신의 생식기 탓이라고 하면서 결국 그것을 자르고 만다. 아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생식기를 들고 관청에 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였지만 문지기는 막무가내로 앞을 가로 막아버렸다.

이렇듯 다산이 살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중앙의 벼슬아치들이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은 안중에도 없이 당파싸움과 세도정치에만 골몰하며 밥그릇싸움에만 열중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영 · 정조 76년 간에 걸쳐 기틀을 잡아가던 개혁의 노력은 1801년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 500년 역사의 마지막 개혁의 몸부림'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다산의 암행어사 시절


다산은 목민관으로서 유배객으로서 이런 비참한 현실을 직접 눈으로 목도(目睹)하고 바로 잡고자하였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금정도찰방으로, 이어 황해도 곡산부사 등 일선 관리로 재직하면서 그는 어진 목민관이 되겠다는 마음을 놓지 않으려고 항상 노력하였다.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연천 현감 김양직과 삭령 군수 강명길의 죄상을 낱낱이 고하여 벌을 받게 하였다. 두 사람은 뇌물을 받고 노비를 풀어주고 군역을 면제시켜주었다. 또 세금을 빼돌려 개인 호주머니를 채우고 국가의 곡식으로 백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여 폭리를 취하는 등 지방 수령이 할 수 있는 온갖 악정은 빼놓지 않고 다하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마음놓고 백성들에게 탐학질을 하는 데는 정조 임금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김양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길 때 묘자리를 봐준 지관(地官)이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를 역임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폭정을 알면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곡산부사로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부임지인 곡산에 이르렀을 때 이계심이란 자가 백성들의 고통 12가지를 적어바치며 엎드려 자수하였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전임 부사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자 천여명의 백성들을 인솔하고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다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이었다. 당장 체포하라고 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냥 보내주면서 그에게 말하길 "수령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폐정을 보고도 수령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마땅히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잘못된 정치를 보고 일신의 안전을 살피지 않고 항의하는 이계심도 훌륭한 백성이지만 이런 사람을 알아 주는 다산도 그에 못지 않은 훌륭한 목민관이 아닐까?

천연두와의 한판 승부

훌륭한 목민관이 되겠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던 다산은 때마침 곡산땅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일명 '마마'라 불리는 천연두가 창궐하자 이에 대한 치료법을 적은『마과회통 麻科會通』12권을 지었다. 그 자신 일찍이 천연두와는 좋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 일곱 살 때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썹이 세 갈래로 나뉘었다하여 스스로를 '삼미자 三眉子'라 불렀고 슬하에 9남매 중 요절한 대부분이 어려 홍역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다산은 당시엔 목숨까지 잃을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었던 천연두의 치료법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을 때 치료해 준 이헌길(李獻吉)에게서 책을 빌려 그 근본원인을 탐구하고 중국의 관련서적 수십권을 뒤져 초고를 정리하고 그것을 다시 다섯 차례나 고쳐 12권의 <마과회통>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 인명보다 이익을 중시하는 의원들을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의원이 의원을 직업으로 삼는 까닭은 이익을 위해서인데 몇십 년 만에 한 번씩 발생하는 천연두 치료로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아도 기대할 이익이 없는 데다 환자를 치료하지도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

밤이나 비가 올 때면 등잔불이나 삿갓을 급히 찾다가도 아침이 되거나 비가 그치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듯이 천연두에 대한 세간의 얄팍한 연구를 비판한 다산은 楚亭 朴齊家와 함께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역사상 처음으로 종두법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출처 : 인왕산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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