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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농암(籠巖)최낙인 시인방(1.2 시집)

인 생(人生) / 籠巖 최낙인

by joolychoi 2013. 9. 27.

 

 

 

 

 

 

 

 인 생(人生) / 籠巖 최낙인
 
 
10 대엔 베아트리체 같은 구원의 소녀를 만나 해맑은 영혼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며 멋진 인생을 출발하고
싶었던 것이 장작차 타고 떠나온 소년의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지갯빛 사랑은 허공 속에 헤매는 한갓 환상일 뿐
어느 잿빛 내려앉은 스산한 날 오후 그녀는 허상의 뒷 모습마저
보이지 않은 채 회오리에 말려오는 바람 속으로 아련히 사라져 갔고
난 황량한 벌판에 내동댕이쳐진 한 서러운 고립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20 대엔 빨간 장미 빛 문학에 매료되어 산야를 쏘다니는
야생마처럼 질풍노도의 격정에 사로잡히곤 하였습니다
지훈과 청마가 잡힐 듯 다가오더니 어느 순간 썰물처럼 저 먼
해원으로 사라지고 영혼이 울리지 않는 환각의 연상 속에
하얀 밤을 지새도 시 한 구절 찾아내지 못한 초라한 자신이
한없이 미워 결국 허접스런 생족에 허우적대며 절필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30 대엔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하는 이상 세계의 괴리 속에서 과연 나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무척이나
그 실상을 알고 있었습니다
생존의 삶도 생활의 삶도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일그러진
진상일 뿐 그 어디에도 진면목의 자화상은 찾을 수가 없었습닏다
그리하여 입신양명의 길도 자아성찰의 길도 꿈길 속에
스쳐간 한 순간의 화려한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40 대엔 양지 바른 곳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 부모님 봉양하고
자식들 키우며 제자들 가르치면서 품격 높은 효행 학덕의 생활을
영위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꾸미고 싶었습니다.그리하여
부모님 말씀 거르지 않고 자식들 돌보며 제자들 바르게
가르치는 보람에 더 바랄 것 없는 소박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한 순간, 어이없게도
내 존중하던 반려의 귀천은 내 꿈의 울타리를 송두리째
걷어내고 말았습니다
   
50 대엔 화려한 기화요초가 아니라도 내 뜻과 채취가 묻어나는
야생화와 수목이 어우러진 소담한 오유지족(吾唯知足)의 정원
하나를 가꾸고 싶었습니다 가시덤불 속에 보는 이 없어도
가시 꽃 피워 내는 엉겅퀴 돋아나고 양심과 도덕률이
하늘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초롱꽃이 피어나고 가을 하늘 소슬한
바람결에 품어내는 들국화 짙은 향기에 취해 햇볕 고루 받아
은혜와 보은의 맛과 향기 드 높은 사과나무 이웃하여,
고고한 지조와 절개로 독야청청 하는 유아독존의
소나무가 있는 그런 정원.
그러나 여기저기 떠돌며 구린내 풍기는 각박한 세정 속에 돌보지
못한 내 정원은 붉은 띠 두르고 팔뚝 휘드르는 남정네의
고함소리에, 가슴 풀어 혜치고 발작하는 여인네의 패악소리에
애써 가꿔 보려던 내 꿈의 정원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습니다
  
60 대엔 굽이굽이 휘돌아 살아온 내 인생 역정에 대한 여과없는 정리와
나날이 새로운 감동을 수수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난 조국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큰 애국자는 아니지만 나름 대로
40여 년간 애환과 울분과 연민의 공직 생활을 영위하여 명예롭게
퇴임할 수 있었음은 신의 가호와 조상의 음덕이 있었음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내 나름대로 살아온 인생
편린들을 정리하여 후예들에게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제2의 인생을 위하여 나날이 새로운 감동의 생활을 연출해 내고
주변에 스쳐가는 사소한 일 하나에도 맑은 영혼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젊은 인생을 살며 내가 터득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쏟아내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내 남아 있는 혼신의 힘을 다 바쳐 마지막 지푸라기 불빛 봉사로
조국 교육에 이바지해 보려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운명의 여신은 나를
비켜갈 뿐 조용한 겸손의 교훈만 안겨주었습니다
  
70 대까지 내가 이 자리에 살아 숨쉬고 있음은 고귀한 생명과 존귀한
인연을 주신 부모님과 정성스런 내조와 아름다운 사랑을 안겨준 아내를
비롯하여 나를 지켜준 많은 분들의 은혜와 축복이 있었음이니 이제
남은 삶 오로지 나눔과 베품으로 보은하는 자세의 인생을 살고 싶을
뿐입니다. 산사로 돌아가는 노승의 무념의 표정처럼,
가녀린 탑돌이 여인의 합장한 기도처럼,
쌈짓 돈 장학금 희사하는 노파의 미소처럼,
한 순간 포착의 감미로운 감동 시 읊어내고 숙인 자 어깨
두드려 가슴 펴게 하고 목마른 자 물 한 모금 전해주고
노을 내린 고갯길 오르려 하오
나로 인해 이웃이 즐겁고 나로 인하여 사회가 따뜻하고
나로 인하여 세계가 평화로운 그리하여 텅 빈 가난의
행복을 누리는 그런 감사의 인생을 살고 싶소.
 
--최낙인 시집<“엉겅퀴”제5부人生>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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