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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2]-權氏 -權氏 - 權氏

by joolychoi 2013. 7. 2.

 

 

 

  

세덕총람 (世德叢覽) 
 
  9. 효. 열부(孝. 烈婦)   

3) 정렬(貞烈)[2]   

ㅇ 권씨(權氏)
안동인이며 최병모공(崔秉模公)의 처이다. 권씨는 부덕이 있고 품행이 방정했다.
남편이 요절하자 임신 중이어서 권씨는 해산을 기다렸다가 딸을 낳았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유서에 말하기를 " 아들을 낳았으면 나편의 뒤를 이으려
했으나 지금 이와 같이 딸을 낳았으니 지하에 가서남편과 혼을 함께하는 것만
못하다." 고 하며 남편을 따라 순사했다.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도로변에
열녀비가 있다.(고성지.고성문화유적지)
(주)최병모(崔秉模 24世):찰방공 최진호의 11세 손이며 최상욱공(崔祥郁公)의 현손
 ㅇ 권씨(權氏)
권씨는 안동인 권학진(權學振)의 딸이고 전주인 최몽옹공(崔夢洪公)의 처이다.
권씨는 시부모를 잘 섬기고 남편에게도 한결같이 성경을 다 하였으며 남편이
병이 들자 백방으로 구약(求藥)하여 조호(調護)하기를 지극히 하였으나 병이
심하게 되자 남편이 부인을 보고 "내가 하늘에 죄를 얻어 부모를 두고 가며, 다만
하나의 여식만 있고 사자(嗣子)가 없으니 내 어찌 눈을 감고 떠나리오.원하건데
그대가 우리 양친부모를 잘 봉양하고 나로 하여금 무후한 부뜨러움을 면하게 하라."
하고 세상을 떠나니 곧 하종(河從)하고자 하며 혼절하였다가 잠시 후에 남편의
그 유탓(遺託)이 민몰될까 불인(不忍)하여 슬픈 눈물을 강음(强飮)하면서고절
(苦節)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시부모 봉양애 한결같이 하고 종자(從子) 최병선공
(崔秉璇公)을 취하여  자식을 삼았으며, 가세가 심히 가난하여 몸소 방적하여
문호를 영보(永保) 하니 향리에서 모두 그 열(烈)과 그 공이 오히려 옛 강진(姜陳)의
효부에  뒤떨어짐이 없다고 하였다.(고성문화유적지)
(주)최몽홍(崔夢洪 20世): 참봉공 최하의 후이고 최치두공(崔致斗公)의 손

 

 ㅇ 권씨(權氏)

씨는 안동인(安東人) 재후(載厚)의 딸이며 이름은 호남이고 전주인(全主人)

최일환공(崔日煥公)의 처이다, 권씨는 18살에 6.25때 참전 중이던 최필환공과 

혼약하였으나 결혼 일에 신랑이 당도하지 않아 반년이 지난 농반기에 휴가오자

서둘러 혼례를 올렸다. 그날따라 장대비가 쏟아져 대청마루에서 식을 마치고

하룻밤을 지낸 다음 날 서둘러서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기구한 운명이 이 부부의

행복을 가로 막는 재앙이었을까? 아들, 딸 두고 오손도손 정답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아름다운 꿈은 남편의 척추신경골절 1급의  전상으로 하반신 마비의

완치불능이란 청천벽력으로 무산되었다. 휠체아에 실려 환향한 남편의 모습은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어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더구나 심각한 부상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절규에는 목석도 눈물없이는 볼수없는 참상이 었다.

홀로 움직이지 못하니 앉히고, 세우고,눕히고,음식 떠 먹이고,대소변 받아내고,

약물 수발은  모두 권씨의 몫이었으니 이는 형언할 수 없는 평생의 고역이었다.

그러나 좋다는 약은 더 써보고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버린채

병 수발에 매달렸다.막내이면서 시모님 모시고 집안 조카들 까지 데려다가 돌보는

정성을 아끼지 않는 아름다운 열행에 하늘도 감동하여 남편의 병이 날로 나아져

사회생활에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호전되었으며, 조카를 양자하여 귀여운

손자 셋을 두었으니 애석하고 갈기갈기  찢겨진 평생의 한이 셋 손자의 재롱으로

풀어져 갔다. 권씨의 이 아름다운 열행에 만 천하가 본 받아야 하겠기에 사회

각 기관에서 장한 아냐 상, 보훈처장의 시상, 대통령의 격려 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전설같은 추억의 숨은 열부 칠순사)

(주)崔日煥: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광곤공(崔光坤公)의 6 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