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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2)효부(孝婦)[3]- 車氏 - 崔氏

by joolychoi 2013. 6. 12.

 

세덕총람 (世德叢覽) 

 

  9. 효. 열부(孝. 烈婦)   

2) 효부(孝婦) [3] 

 
ㅇ 차씨(車氏)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고려 조 문절공 차운암(車雲岩) 선생의 후이고 사인(士人)
차익선(車益善)의 딸로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최광빈공(崔光빈公)의 6세손인
전주인 최싱용공(崔相庸 譜名崔庸洛)의 처이다
타고난 모습이 인자하여 여자로서의 부덕을 갖춘 훌륭한 규수로서 출가하였다.
ㅚ씨 가문의 생활이 궁색하였으나 시부모를 효로서 공경하며 섬겼다.
시부가 불행하게 질병으로 오랫동안 누워 지내니 약을 달이고 죽을 쑤어 수년
동안에 하루같이 빔낮으로 간호에 매달렸으나 1925년 을축에 별세하니 차씨는
남편과 함께 슬픔을 다하고 예에 따라 장례를 후회함이 없도록 정성껏 치루었다.
상(喪)을 면하니 시모 박씨가 또 병이 깊어 몇년을 두고 낳지 않으니, 차씨는 새벽,
저녁으로 하늘에 기도하고 약물을 받드는 등 지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대소변과 긎은 빨래를 꺼리는 기색없이 8년간을 하였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하자 이웃 종척(宗戚)들이 감동하여 칭찬이 그치지 않고
말하기를 " 최씨 집은 가난하지만 효가 극진함이라 이 같은 현처(賢妻)가 없다."
고 했다. 을해년(1935)에 남편이 별세하자 차씨는 5남 1녀를 공부시키고 성취시키니
현달하고 영화로움이 많아 선조의 덕업을 받듦에 더욱 정성을 다하고 가난한
이웃에게는 구원의 마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오년(1942)에 해변이 아닌
금산(錦山) 골짝 내산리(內山里)에 굶는 주민이 많아 차씨는 이를 불씽히 여기고
분수에 맞게 ㄷㅗ와서 걱정을 덜어 주었다.
오호라 이제는 내 한 몸 시부모의 봉양도 지니갔으니 오직 배 고픔만 침고 살라는
것이 내 자손을 위한 남편의 뜻이라 55살 되는 을유년(1945)에  별세하니
차씨의 사행(事行)을 시종(始終) 본 면  유생들이 이 사실을 들어 고하니 본군
유회(儒會)때 한상은 전교(韓相殷典敎)가 성균관에 천거하고 향교에서 효부로
표창하니 동민 일동이 뜻을 모아 남해군 상동면 봉화리 내산마을 입구에
효부 비를 세웠다.(현지 확인.비문)
(주)차씨(車氏)의 아들은 최종환,최윤환,최치환,최기환,최양환인데,최치환공은
서울시경국장과 중앙정부 공보실장을 역임하고 국회 5선의원을 지냈다.
 
 

 

ㅇ 최씨(崔氏)
최씨는 휘가 시덕(時德)이며 삭령인 최태범(崔泰範)의 장려이고  전주인 최낙칠공
(崔七公)의 처이다. 32살에 도일한 남편이 객사하자 혼자서 길삼과 고공으로 실명한
시아버지와 어린 5남매를 부육하며 피나는 노력으로 종가를 보존하였다.
시아버지 최보국공(崔保國公)의 일거일동을 부축하며 대소변 시중등 82살에 돌아가실 때까지 장장 26년간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으며 거상삼년(居喪三年)도 생전같이
모시니 향리에서 칭송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중년이후에는 더욱 인자하고 청수의연하며 가상한 부덕이 사회의 모범이 되어
 그, 가명(嘉名)이 군면(郡面)으로 알려져 효부상(孝婦賞)을 받은 사실이
사천군지 동성승람(東城勝覽)에 실려있다.
최씨 부인은 1982년 음 6월 1일에 타게하니 향년 93살이며 유택4은 사천군 용현면
선진리 408 간좌(艮坐)이고 1987년 10월에 효부 기적비가 선진리 산 17번지에
세워졌다.(최현휴)
(주)최낙칠(崔七 20세):참봉공 최자교(崔自郊)의 후이고 죽전입향조
최한두(崔漢斗)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