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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1)효녀(孝女)-李氏 . 2)효부(孝婦)[1]-金氏-金氏-朴氏

by joolychoi 2013. 5. 20.

 

 

  

세덕총람 (世德叢覽)  

 

  9. 효. 열부(孝. 烈婦)   

1) 효녀(孝女)  

 
ㅇ 이씨(李氏)
함안인 이필규(李佖奎)의 딸이고 전주 최동호공(崔東鎬公)의 처이다.
어려서 부터 매우 착한 성품을 갇ㄷ졌었다. 연로한 모친을 가까이 모셔놓고
때마다 맛있는 새 음식이 있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고 자녀에게 들리고
가서 음식을 드시게 하였다. 모친이 별세하자 아들 최규한공(崔圭瀚公)에게
유훈으로 "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를 바꿀 수 어뵤다." 라 하였다.
(환여승람. 고성지)
(주)최동호(崔東鎬22世): 보면(譜名)은 최보열(崔輔烈)이다.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최5시대공(崔始大公)의 현손이며 최상준공(崔祥駿公)의 손
 
2.효부(孝婦)[1]
 
ㅇ김씨 (金氏)
김해인 김의형(金義亨)의 딸이며 효자  최태진공(崔泰晉公 19世)의 손인
최병립공의 자이다. 시부가 몇 달을 병을 앓자 약과 음식을 잘 갖추었고
대소변을 직접 받아냈다. 하늘에 기도를 올리고 약을 달이면서도 정성과
공경을 다하엿다. 얼마 후 시모가 병이 들어 부증(浮症)이 생겨 위험한
상태에 이르자 곧 허벅지 살을 베어 구워서 올리니 그 부증이 곧 풀리자
향리에서 포장 하였다..(환여승람. 고성문화 유적지)
(주) 죄병립(崔秉立21世): 참봉공 최하(崔河)의 후이고
남파공 최태진(崔泰晉)의 손
 
ㅇ김씨 (金氏)
김해인 사인(士人) 김수태(金守兌.족보상 金守坤)의 딸이며 처사 최홍림공
(崔鴻林公 26世)의 처이다.김씨는 시집와서 가난한 가세임에도 시부모를
섬기는 일에 조금도 소홀한 점이 없었다. 시 아버지가 수년동안 병이 깊어
진지와 시탕의 효성이 극진하였으나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운명에 이르자
스스로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시아버지 입에 드리우니 다시 깨어나서
아들과 며느리를 알아 보았다고 한다. 천수를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이 효행이
널리 알려져 그 효를 칭찬하던  향당 100여명이 효행문을 작성하여 관가에
품신하고 향당에서 포상하였다.(최연국 증언)
 
ㅇ박씨 (朴氏)
박씨는 휘 수동(壽童)이고 울산인 박종대(朴鐘大)의 딸이며 전주인
전주인 최종환(崔鐘煥 일명 秉龍) 처이다. 박씨는 천성이 온후하여 매사에
신중할뿐 아니라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5살 어린 나이로 전주 최씨 가문으로 시집와서 어려서 배운 예의와 범절로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슬하에 2남 4녀를 두고 한결같은 자정으로 길러
부모 뜻에 벗어나는 자녀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어
주변의 칭송이 자자하였던 행복의 가정이었다.그러나 부군(夫君)의 뜻하지
않은 송사로 가산이 탕진되자 생활이 궁핍지경에 이르렀고 설상가상으로
85살의 시모(善山人 金義賢)께서 시력을 잃은 고통속에 6.25 사변까지
겹치니 가정형편은 극난으로 치달았다. 시구들을 피난시킨 후 홀로 남아
시모의 수발에 성심을 다하였다.그러다 9.28 수복 후 한 가족이 모여 살게
 되어 농사일을 돕기 품팔이 삯바느질 시모 병 수발등에 전력을 다하였고
그런 와중에도 자녀들의 공부 뒷바라지에조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장남 양호(亮浩)는 백부의 후사로 출계하고 차남 성호(聖浩)는 고위직
공무원으로 국내는 물론 외국공관 영사를 역임하고 현재는 대학 강당에서
후학 지도에 임하고 있다. 이같은 박씨의 효행과 자훈(慈訓)이 향내에 알려지자
모두가 하늘이 내린 효부요 자모로 동양부도의 귀감이라 칭송하여 마을
동민(중북 중원군 주덕면 삼청리)의 이름으로 효부상을 내렸으며 중원군수에계
효부상을 추천하자 박씨는 " 나는 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봉양함은 당연한
도리이며 자식을 양육함은 부모된 책임을 다 하였을 뿐이다" 라 하고
사양하니 그 갸륵한 마음씨에 더더욱 칭송이 높았다.(옥산회보)
(주)최종환(崔鐘煥23世): 인재공 최현(崔晛)의 후이고
진사공 최운승(崔雲承)의 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