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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9. 효. 열부(孝. 烈婦)-3)정렬(貞烈)[1]- 姜氏-康氏-郭氏-權氏

by joolychoi 2013. 6. 24.

 

 

 

  

세덕총람 (世德叢覽)  

 

  9. 효. 열부(孝. 烈婦)   

3) 정렬(貞烈)[1]   

ㅇ 강씨(姜氏)
정부인(貞夫人) 강씨는 진양인 강치언(姜致彦)의 딸이며 호조참판을 지낸
전주인 최제회공(崔濟會)의 처이다. 어려서 부터 영특하여 평판이 좋았으며
시집을 와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남편이 병이 들어 8년간
침상에 누워있자 약수저로 죽을 퍼먹이며 지극 정성으로 간호 하였다.
남편의 상을 당하자 "지아비가 죽으며 지하를 따라 가는 것이 마땅한 예이다."라
하고 자결하려했으나 아들 병덕(秉悳)이 거듭 눈물을 흘리면서 ㅁ반류하자
자식이 아직 어려 제사를 맡길 곳이 없어 차마 자결하지 못하였다.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대상이 끝나자 곧 남편다라 자결하였다.
향리에서 포열비(褒烈碑)를 세웠고 그 사적이 광양읍지에 실려있다.
아들 병덕도 어머님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손자 진열(鎭烈) 역시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효성과 우애가 독실하였으며
문명(文名)도 크게 들어 났다.(세헌록)
(주)최제회(崔濟會 20世): 참봉공 최자교(崔自郊)의 후이고 최성민(崔聖民)공의 자
 
ㅇ 강씨(康氏)
해평 사인(士人)최취천공(崔就천公)의 처이다. 시부모가 완악하여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으나, 강씨는 부도를 지켜 부모를 정성으로 봉양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가
하기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에 시부와 남편의 상을 당하여 곧 자결하고
싶었으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당장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언제나 단도를 품고
때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전란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 갔다.
마침내 가졌던 단도로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장한 일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정려(旌閭)를 내렸다.
(구미의 역사와 인물.문향금오)
(주)최취천(崔就천 10世) 검재공 최수지(崔水智)의 증송
ㅇ 곽씨(郭氏)
곽씨는 현풍인 곽대곤(郭大坤)의 딸인데 전주인 최근호공(崔根鎬)의 처이다.
15살에 시집와서 시부모 섬기는 도리를 다하니 이웃에서 어리면서도 어른
모시는 예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시어머니와의 화의(和誼)가 남달리 유별하여
모두가 칭찬 하였다. 남편이 우연히 병이 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손가락을 잘라
입에 피를 주입하여 머칠간 더 연명하였으나 25살에 세상을 떠나니 그 애통함이
극에 달했다. 슬하에 딸 하나만 두어 후사가 없어 시동생 용호(溶鎬)의 아들
낙관(洛琯)을 후사로 하여 시부모 봉양과 육아에 성심을 다하였다.
시 부모 상을 당하였을 때는 지극 정성으로 예를 가하였으며 친척들에게도
두터운 애정을 나누었다. 아들 낙관이 취학하자 비바람이 불면 언제나 업어서
학교에 보냈고 또 이르기를 "학문의 성취는 가문의 희망이라 집안에서
덕의(德義)를 지켜 몸가짐을 단정히 함이라." 라 하니 모든 사람들은 부인의
지극한 효친을 칭찬하였다.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 도로변에 "효열부 최유인
현풍곽씨 지 비."를 세웠다.(비문)
(주) 최근호(崔根鎬 24世): 찰방공 최진호의 11세 손이고
만회공 최즙(崔檝)의 10세 손
ㅇ 권씨(權氏)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월암(月巖) 권용현(權龍見)의 후이며 최광락공
(崔光洛公)의 처이다. 부도(婦道)와 행실(行實)이 있었다. 남편이 병들자
약이란 약은 안 해 본 약이 없으며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주입하니 살아났다. 향당(鄕党)의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고성지)
(주)최광락(崔光洛 19世):해정공 최수강(崔秀岡)의 후이고
최주천공(崔柱天公)의 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