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에는 마른 듯한 상태의 붓으로 그리는 갈필(渴筆)기법을
사용해 한국화의 새로운 정형을 완성한 청전(靑田) 이상범의
수묵산수화 '야산귀로(野山歸路)'와 천경자의 한지채색화
'어군(魚群)', 조중현의 '우중구압(雨中驅鴨)'등 명품급
한국화는 물론 김인승의 '독서하는 여인', 심형구의
'수변(水邊)' 등 미술계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근대
유화작품들도 있습니다. 한은내 미술품들은
장부가격로만 39억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한은이 1950년대 정부의 미술 장려 정책 때문에 미술작품들을
많이 구입했다고 합니다. 6·25전쟁 이후 붓을 꺾고 길거리에
나앉는 작가들이 급증하자 정부가 한은을 동원해 이들의
미술작품을 사들이도록 했다는 것이지요. 당시엔 돈이 있던
곳이라고는 한은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으니까요.
한은의 미술품 구매는 작가들에게 ‘가뭄 속 단비’와
같았다고 합니다. 사정이 다소 호전된 1980년대에도 이런
정부 방침은 ‘문화예술진흥법’으로 이어졌습니다.
문화예술진흥법 9조는 일정 규모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는
건축비의 0.5~0.7%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미술품을
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 2011년 7월 26일 웬만한 미술관보다 더 많은 작품을 보관하고 있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 본점 1층 창고의 모습. 한은은 6.25전쟁 이후 미술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 유명 작가들의 작품 1300여점을 매입했다. /조선일보DB
그래서 한은은 본관과 별관을 신축할 때마다 미술품을
사들였습니다. 당시 한은은 각 지방 본부를 통해 지방
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여 지방 화단의 활성화에도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등학교를 중퇴하고 독학으로 조각 예술을 익힌
김오성 작가의 여성 누드 조각상에 대해 한은은 높은
작품성을 인정해서 당시 1500만원을 주고 사들였습니다.
한은은 2008년 2월 이종상 화백의 신사임당 초상화를
매입해 이 그림을 토대로 5만원권 도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 한은 신관 앞 기념비.(김중수 총재 때 세운 것)
일반 시민들은 구경조차 힘들어, 자화자찬성 업적
자랑용 기념비 ‘눈쌀’
하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은이 보유한 미술품들이
시민들과 갈수록 동떨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경내에 있는 각종 조각상들은 한은의 보안 강화 및
출입 통제로 대중들이 감상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다른 미술품들도 본점 화폐금융박물관 2층 한은
갤러리에서 수십점씩 전시하는 게 고작입니다.
나머지는 한은의 본점과 각 지점 사무실에 미화용(美化用)으로
걸려 있거나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은 한은 마당에 있는 두개의 기념비입니다.
신관 건물 입구에 있는 2012년 1월 세운 기념비에는
“한국은행의 금융안정 책무를 강화한 제8차 개정 한국은행법이
2011년 12월 17일 시행되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즉, 한은법 제1조에 ‘물가안정’ 외에‘한국은행은 통화신용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금융안정에 유의하여야 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을 기념한다는 거죠. 이 내용은 김중수 현
한은 총재가 본인의 업적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맞은편에 있는 기념비에는 “한국은행의 역할을 넓히고 중립성을
강화한 제7차 개정 한국은행법이 2003년 8월12일 국회를
통과하여 오늘부터 발효된다”는 글귀가 있습니다. 2004년
1월에 세운 이 비석의 내용 역시 박승 당시 총재가 이뤄놓은
업적 중 하나를 자랑하는 것이지요. 7차 개정 한국은행법이란
7명의 금통위원 중 본래 있던 증권업협회장 추천 자리를 없애고
대신 한은 부총재를 당연직 금통위원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한은 총재와 부총재가 모두 금통위원이 되니 한은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수 있는 표가 7표 중 1표에서 2표로
늘어나 한은의 영향력이 확대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한은 마당에 세워져 있는 기념비.(박승 총재 때 세운 것
비석 내용에 직접표현은 안 돼 있지만, 비석을 세울 당시
총재인 박승, 김중수 두 사람 개인에 대한 ‘송덕비(頌德碑)’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도 본인 임기 중에 세운 것이니,
뜻있는 한은 사람들은 그 기념비를 볼 때마다 ‘부끄럽다’고 생각
한답니다. 꼭 기념비를 세워야 법 개정 내용이
기억되는 건 아니니까요.
더욱이 한국은행 어디에도 한은의 독립성을 높인 법 개정을
기념하는 비석이나 표지판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1998년 한은법 개정을 통해 예전까지 경제부총리 겸 재정
경제원 장관이 맡았던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한은 총재가
맡게 됐습니다. 이처럼 의미있는 일에 대한 기념비는 없고,
그것과 비교해서 작은 내용을 개정한 한은법 개정에 대한
기념비만 있다는 게 우리나라 중앙은행의 현주소이자
의식 수준인 듯해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출처: waple chosun.com./wapl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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