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부모님은 저를 어린 나이에 가지게 되셨대요.
그래서 감당하지 못하는 일이 현실로 다가왔겠죠.
부모님은 제가 세 살 되던 해에 이혼했어요.
저에게는 부모님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세희는 할아버지·할머니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부모님(할아버지·할머니)은 보통 부모님보다 머리가
빨리 하얗게 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자라자,
남들과 다르다는 외로움이 뼛속까지 스몄다.
"어려선 미미 인형이 소중했어요. 4학년이 되니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이런 아이들은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이유로
내 곁을 떠났어요. 내가 고아라는 소문이 돌았어요.
선생님은 급식비 내라는 종이를 저만 빼고 모두에게 나눠줬어요.
다 보는 앞에서 우유 박스를 건네며 '집에 가서 동생도 주라'고
하셨어요. 나는 특이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거지 같았어요. 내가….
다 싫어졌어요, 짜증 났어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뒤 세희는 재혼한 고모 집으로 갔다.
비좁은 집(56㎡·17평)에 고모 부부와 양쪽 아이들, 세희와 세희
동생까지 9명이 북적거렸다. 세희는 가출을 반복했다.
노는 아이들과 어울렸다. 나쁜 짓인 줄 알면서도 자꾸 삐딱해졌다.
남을 때리고 돈을 뺏으면서,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욕했다.
'이 ○ 같은 세상. 왜 처 낳아서는…. ○ 같게….'
사진을 배우면서 세희는 변했다. 사방이 막힌 교정에서 세희는
난생처음 어른들에게 "사진 잘 찍는다" "글도 잘 쓴다"는 칭찬을
받았다. 헤어 디자인도 익혔다. 고모와 할머니가 먹고사는 데
부대끼면서도 마음속 깊이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걸 느꼈다.
세희는 예정(2년)보다 8개월 빨리
다음 달 정심학교를 나간다.
공립 기숙사에 살면서, 경기도의 한 미용실에서 보조사원으로
일하게 됐다(월급 90만원).전시장에서 만난 세희는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세희의 사진 일기는 이렇게 끝났다.
"언젠가 부모님이 나를 찾으신다면 꼭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