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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무'에 빠진 우리 선생님

by joolychoi 2008. 9. 25.
'잡무'에 빠진 우리 선생님
공문 처리… 공납금 독려… 외부행사 동원
1인당 年 90여건 공문 다뤄… 9월 특히 많아
자습시키기도… 수업 준비는 밤늦게나 해야
최수현 기자 pau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이영민 기자 ymle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지난 18일 오전 9시, 대구의 한 중학교 C(30)교사는 부장교사로부터 공문 5장을 한꺼번에 받았다. '학업성취도평가 응시학생 인원 조사' '학교폭력 피해 학생 조사' 등 10월에 열리는 국회 국정감사를 앞두고 국회의원들이 통계자료를 요구하는 공문들이었다. 공문 앞엔 '당일 처리 요망' '긴급' 표시가 붙은 것도 있었다.

C교사는 그때부터 각 교실을 돌아다니며 '올해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는 체육 특기생, 단기 결석생 인원수'를 담임교사들에게 일일이 묻고, 자기 반 아이들에게 학교폭력 관련 설문을 실시해 통계를 냈다.

"하루 수업은 4시간뿐인데 공문 처리에 날마다 2시간 넘게 써야 합니다. 교재연구나 수업준비는 오전 7시에 일찍 출근해서 하거나, 퇴근 후 밤 10시 넘어 하는 수밖에 없지요."

C교사처럼 전국 교사의 60%는 '교사의 역할이 수업·생활지도보다 행정업무에 치중돼 있다'고 느끼고 있고, 40%는 공문 처리 때문에 수업에 늦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교총조사, 2007). 교사들은 "교사들의 '잡무(雜務)'가 많아지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소홀해진다"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9월은 '공문의 달'

교사 '잡무'는 대체로 '교육과정 운영과 교육활동 이외의 업무'로 정의된다. 공납금을 내도록 독려하는 일, 각종 성금을 관리하는 일, 장부 정리, 외부 행사 동원, 교과서 신청과 대금 회계 처리, 학생 전·입학 서류업무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지난해 낸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대구 K초등학교의 경우 2006년 한 해 동안 4675건의 공문이 발송·접수됐고, 교사 1인당 연간 91건을 처리했다. 3건 중 1건은 사흘 내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소규모 학교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 경북 B중학교의 경우 한 해 공문 수는 총 4302건이었지만, 교사 수가 39명에 불과해 1인당 110.3건을 처리했다. 특히 국감을 앞둔 9월에 가장 많이 집중돼(17%), 각종 업무로 바쁜 학기 초에 부담이 가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교총이 지난해 전국의 교사 63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접수된 당일 내로 보고하라는 공문을 처리하느라 수업에 늦은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40%가 '그렇다'고 답했다. '급히 보고하라는 공문은 수업결손을 하면서라도 기일 안에 보고한다'는 교사는 절반을 넘었다(55.6%).

이에 대해
서울 K초등학교 L교감은 "예전엔 일방적인 '지시'였지만, 요즘은 '협조사항'으로 오는 공문이 많아 학교가 자체적으로 협조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도 있고, 온라인 시스템도 발달해 전보다 사정이 나아진 편"이라고 했다. 그러나 교총의 10년 전 조사(1998년, 연간 3433건)와 비교했을 때 공문 수는 오히려 늘어났고, '잡무처리로 인해 교과활동을 소홀히 한 경험이 있다'는 교사들의 응답(2003년, 43.3%) 역시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교사들은 "공문을 처리하느라 수업 도중에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거나 갑작스럽게 보건교사의 보건수업으로 대체하는 일이 벌어지면 결국 학생들만 손해"라고 말하고 있다.

시스템·인력문제 개선해야

교원단체들은 공문을 처리하는 절차나 시스템상의 문제도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교육청에 보고한 사안이나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에 입력한 내용인데도 관행상 학교에 또다시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
교육부·교육청 통계 담당 직원들이 NEIS의 운용 등에만 관심을 가질 뿐, 각종 데이터를 자체적으로 적극 활용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경우엔 교육통계나 감사를 위한 자료를 수집할 때, 이미 전산시스템에 입력된 자료를 바탕으로 주 교육부 단위에서 통계를 자체 작성하고, 학교엔 직접 자료를 요구하지 않는다.

행정인력 충원도 시급한 과제다. 대학교수로 재직하다 6개월 전 서울의 한 사립고 교장으로 옮긴 S교장은 "대학은 행정직원이 200명을 넘는데, 내가 일하는 고교는 24개 학급에 행정인력이 3명뿐"이라며 "결국 행정업무는 거의 교사 몫이 되고 정규 교과수업,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 감독까지 하고 나면 교과연구나 수업 개선에 쏟을 시간이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했다.

영국은 지난 2001년 교사들이 하루 일과의 4분의1 이상을 '교수 전문성이 필요 없는 행정적인 일'에 소비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뒤부터, '잡무'로 판단되는 업무를 7개 분야로 세밀하게 나눠 각 분야별로 지원인력을 배치했다. 각 지원인력이 담당할 업무까지 구체적으로 지정해, 교사들이 교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관계자는 "행정업무를 담당할 정규직 공무원을 무조건 늘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학교현장에 비정규직 인력을 대거 고용할 수도 없다는 것이 고민"이라며 "교사 잡무를 줄이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