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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공(可川公崔正基)과후손애대하여

가천공(可川公 崔 正 基) /江右儒脈 / 儒學/南冥學派

by joolychoi 2018. 8. 17.

 





 

     가천공(可川公  崔 正 基) /江右儒脈 / 儒學/南冥學派



     

    고성 일대에는 전주(全州) 최씨(崔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임란 때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운

    의민공 최균과 의숙공 최강의 후예들이다.

     

     지금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는 왜적을 섬멸한

    의민공 소호(蘇湖) 최균(崔均)과 의숙공 소계(蘇溪) 최강(崔堈)

    두형제의 공을 높이 새겨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유지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이 있다.

     

     고성의 전주 최씨들은 임란 공신의 후예들답게 한말까지

    가풍을 이어오며 지역의 학문을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서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성군 개천면 청광 마을에 가천정(可川亭)이 있다.

     

     일찍이 고성 선비들이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니

    나무들은 알맞게 어울렸고 샘터와 바위가 아름답구나

    (背山臨水 樹木扶疎 石泉明麗 ”라고

    경치를 읊조렸던 명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옛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수풀만 우거져

    인적조차 드문 곳이 되어 버린 듯 했다.

     

     한때 고성의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시를 읊조렸던

    가천정의 주인은 바로

    가천(可川) 최정기(崔正基)라는 선비이다.

     

     가천 최정기는 1846년 화산리 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의민공(義敏公) 최균(崔均)의

    후예답게 태어나면서 자질이 남달라 5~6세 때부터

    서책을 가까이 하면서 독서를 즐겨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공부에 매진해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12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족조(族祖)인

    경재(絅齋) 상순(祥純)에게 공부를 배우면서 남이 백번을 하면

    자기는 천번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해 경재는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집안 사람들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재’라고 칭찬을 했다.

     

     한때 황매산 자락의 삼가 구평(龜坪)으로 이주를 해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등 당대 대선비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모여 강론을 했다.

     

     구평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인근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니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명성이 자자해지니 고을의 원이 만나고자

    했다. 가천은 고을 원이 불러도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가천을 보고 고을 원은 “최모는 문학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진실로 덕을 이룬 군자”라고 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올리니,

    서산이 자질을 시험해 보고 크게 칭찬을 하며 작별을 할 때는

    대산 선생의 교훈 2절을 글로 써 주었다.

     

     가천은 이를 간직하고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가천이 떠나고

    난 뒤 서산은 제자인 수재 유정호에게 “최군은 경술(經術)과

    지조가 요즘 친구들과 비교할 수 가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사진설명: 가천이 학문을 연마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가천정과 현판


    가천은 서산 제자답게 퇴계의 학설을 신봉하고 있었다.

    퇴계의 학맥을 이은 한주 이진상이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창하고 후산 허유, 면우 곽종석 등이 이를 따르자 가천은

    견해를 달리하면서 ‘심설고증(心說考證)’지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심즉리설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간재 등 기호학파들이

    비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서로 모자라는 것을

    보충해 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서산에게 퇴계의 학문을 배운 가천은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지도에 전념한다.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선비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어 가천의 위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가천정’이라고 이름 붙이고 수학의 장소로 삼았다.

    공도 호를 ‘가천’이라고 명명하고 이곳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힘써 가르쳤다.

     

     가천정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시를 읊조리고

    살면서 당시 일대 학문을 주도한 그는

    1905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제들에게 안상수분(安常守分)

    독서과농(讀書課農)이란 유언을 남겼으니,

    자기 본문을 지키며 독서와 본업에

    충실하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가천은 서산 김흥락의 문하생으로 일찍부터 자립하다가

    늦게서야 커다란 선비가 되었다. 성리학을 명쾌하게 드러내고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취지를 천명하고 발휘해

    한 세상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다.

     

     문집(文集) 8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는데

    아들 명희(命熙)가 1934년에 간행하였다.

    ‘중용설(中庸說)‘고증성학총요(考證聖學摠要)’

    ‘취정일록(就正日錄)’ 독선석사강록( 讀禪石寺講錄)’

    ‘심설고증(心說考證)’ ‘구음재회화(龜陰齋會話)’ 등의

    글들이 실려 있으며 학문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

     

     ‘독선석사강록’은 장복추( 張福樞) 이진상이

    선석사(禪石寺)에서 행한 강록(講錄)을 보고 자신의 의문을

    附記한 것이고 심설고증(心說考證)은 심설에 대한

    선유(先儒)의 논설을 기록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회봉 하겸진도 가천을 일러 일찍이 서산 선생을 사사하여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학문을 계승했다고 했으니,

    퇴계의 정맥을 이은 선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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