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일대에는 전주(全州) 최씨(崔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임란 때 왜적을 물리쳐 공을 세운
의민공 최균과 의숙공 최강의 후예들이다.
지금도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는 왜적을 섬멸한
의민공 소호(蘇湖) 최균(崔均)과 의숙공 소계(蘇溪) 최강(崔堈)
두형제의 공을 높이 새겨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방유지들이
창건한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이 있다.
고성의 전주 최씨들은 임란 공신의 후예들답게 한말까지
가풍을 이어오며 지역의 학문을 주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서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성군 개천면 청광 마을에 가천정(可川亭)이 있다.
일찍이 고성 선비들이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니
나무들은 알맞게 어울렸고 샘터와 바위가 아름답구나
(背山臨水 樹木扶疎 石泉明麗 ”라고
경치를 읊조렸던 명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옛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수풀만 우거져
인적조차 드문 곳이 되어 버린 듯 했다.
한때 고성의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닦고 시를 읊조렸던
가천정의 주인은 바로
가천(可川) 최정기(崔正基)라는 선비이다.
가천 최정기는 1846년 화산리 집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의민공(義敏公) 최균(崔均)의
후예답게 태어나면서 자질이 남달라 5~6세 때부터
서책을 가까이 하면서 독서를 즐겨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히 공부에 매진해 집안 어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며,12세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족조(族祖)인
경재(絅齋) 상순(祥純)에게 공부를 배우면서 남이 백번을 하면
자기는 천번을 하겠다는 각오로 공부에 매진해 경재는
이를 매우 기특하게 여겨 집안 사람들에게
‘집안을 일으켜 세울 인재’라고 칭찬을 했다.
한때 황매산 자락의 삼가 구평(龜坪)으로 이주를 해
만성 박치복, 후산 허유 등 당대 대선비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모여 강론을 했다.
구평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인근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니
명성이 더욱 자자했다. 명성이 자자해지니 고을의 원이 만나고자
했다. 가천은 고을 원이 불러도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가천을 보고 고을 원은 “최모는 문학만 뛰어난 줄 알았는데
진실로 덕을 이룬 군자”라고 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찾아가 제자의 예를 올리니,
서산이 자질을 시험해 보고 크게 칭찬을 하며 작별을 할 때는
대산 선생의 교훈 2절을 글로 써 주었다.
가천은 이를 간직하고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가천이 떠나고
난 뒤 서산은 제자인 수재 유정호에게 “최군은 경술(經術)과
지조가 요즘 친구들과 비교할 수 가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