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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천공(可川公崔正基)과후손애대하여

靑松公 諱 炳翰 (27世)

by joolychoi 2014. 3. 13.

 

 

 

 

  

세덕총람 (世德叢覽)  
靑松公 炳翰 및 배위 晉陽姜氏雙墳-27世
 
 
 ㅇ 靑松公 諱 炳翰 (27世)
아명(兒名)은 수특(壽特)이고 자는 홍여(鴻汝)이며 호는 청송(靑松)이다.
체구가 비교적 거구이며 성격을 약간 직선적이며 창의력과 활동성 및 추진력이
강한 편이었다. 찰방공 최진호의 후이고 산와공 최수회(崔壽會)의 10손이며
가천공 최정기(可川公 崔正基)의 증손이다.
 
공의 증보부 가천공과 조부 효당공(崔洛文)은 향내는 물론 영남에서도 이름 높고
고매하신 유학자 였다. 공은 유가의 후예로 삼으려는 조부 효당공의 총애로 일찍
한학에 입문하여 천자문. 동몽선습.통감등을 배워 초보적인 유교교리(儒敎敎理)와
위인 입신도(爲人立身道)를 훈도 받게 되었는데,조부의 교시(敎示)는「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자기의 분수를 지킬 것이며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고 자기 과업에
힘쓰라.(安常隨分讀書課農) 」이 었다.
그러나 때마침 마산상업학교에서 수학중인 숙부(賢林)의 영향으로 신학의
보통학교를 거쳐 진주농업학교 진학으로 자신의 진로가 이때 결정되었다고
회고하였다.공의 학업은 숙부(賢林)께서 ,반성에서 기차 통학은
숙모(金寧金氏)께서 뒷받침해 준 덕분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공직은 경상남도 산업국 지정과(地政課) 근무가 처음인데 농지업무 취급요령을
시.읍.면 농지업무 담당자를 교육시켜 업무능력을 진작시켰다. 고성군과 동래군
내무과장 그리고 창원군수 대리를 거쳐 사천군수 재임시에는 양돈사업보급에
행정력을 경주하였고, 진양군수 재임 중에는 8대 특수사업을 선정 추진하여 군민의
소득증대와 허례허식 배제로 합동 제수 구입과 합동세배는 큰 성과를 올렸다.
지게 대신 리어커 보급과 초가지붕 개량 등으로 많은 시찰단이 다녀 갔으며,특히
명지면 관지리 수해지역 복구대처와 금산면 속사리 새마을 육성은 이곳 주민들로
부터 큰 호응을 받아 임지를 떠난 3년 뒤에 그 치적을 찬양하는
송덕비가 두곳에 건립 되었다.
마산시장 재임시에는 난민 주택건립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무주택 난민의
안식처를제공해 나갔고 마산대학의 분규수습을 위해 학장서리에 임하여
정상궤도에 진입시키기도 하였다.
 

 

울산시장 전임 떼에는 울산시 승격 3년만이라 시정 여건이 열악하였다.
더구나 혁명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공업도시 건설의 기반 작업이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의 투자가들의 유치활동을 적극 추진하고 동시에
공장부지제공에 행정력을 총 동원하였던 바, 대단위 공장건설이 속출하여
오늘의 울산 공업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김현욱 서울 시장과 함께 유럽과 동남아 제국의 선진도시를 견학하기도 하였다.
부산시 상공국장으로 전임되었을 때에는 수출 제일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던 때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 때
수출을 위한 금융시책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시설운영 수출 금융자금의
저리융자와 DA.USANCE시책이라고 즉석 답변하니 주위 배석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였다.상공국장 4개월 만에 내무국장 자리로 옮기고 부산시화를
동백으로, 부산시 상징색을 바다색으로,부산시 상징새는 갈매기로 제정하는데
보좌하였다. 1970년 부산시 초대 기획관리실장으로 전임하여 시정현황과
부산시의 미래상에 대하여 상세한 개수를 열거하면서 실감있게 설명하여 많은
공감을 받았고 "계수실장(計數室長)"이란 별명을 받기도 하였다.
 

경기도 기획실장으로 전임되자 서울시내 각처의 무허가 판자 집 철거에 따른

이주대책지였던 경기도 광주시 성남 단지에 이주민듫의 난동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요구사항을 수립 해결하여 오늘과 같이 서울특별시

위성도시로서 구실을 다하게 하였다.

 

1973년 이사관 승진으로 제주도 부지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도의 특색을 살려 경종(耕種)방법을 개선하여 원시 영농상태를 현대영농

기법으로 탈피시켜 식량증산과 농지활용 제고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리고 백록담과 일출봉, 천지연. 만장굴 등의 관광자원을 개발하여 국제관광지로

조성하려는 정부 시책에 적극 호응하여 전도민의 관광 요원화의 기치를 내 걸고

추진에 박차를 가하여 오눌위 관광 제주가 있게 한 기틀이 되었다.,

제주도 부지사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1975년 지방행정 공제회

초대 회장과 1977년 (주)신양사 사장 그리고 (주)가성실업을 창설하여

자영사업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종사(宗事)는 전주최씨 서울화수회와 도산회(재경 고성출신 전주최씨종친회 전신)

그리고 종사 외(外)는 가야회(부산 경남 사무관이상 재경모임)와 춘추회(진주농업

학교 30회 이전 졸업생 친목회)에도 참여 하였다.

 

공직 재임 중에는 홍조근정 훈장을 비롯하여 수 많은 표창과 감사장을 받았으며,

특히 서독 3등 십자훈장과 이디오피아 3등 훈장을 해당국 대통령으로 부터

수상하였으며 중화민국으로 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최병한 회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