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또한 조선시대의 성곽이 갖춰야 할 성내시설도 완벽하다.
본성 외에 봉암성, 한봉성 등 2개의 외성을 갖추고 있으며, 남쪽에는
두 개의 돈대가 있다. 본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으며, 20여 개의
포루를 설치하여 화포공격이 가능하도록 했다. 성벽에는 4대문 외에
16개의 암문이 있으며, 성벽 위에는 1,940여개의 타로 구성된
여장이 구비되고, 각 타에는 원총안과 근총안이 설치됐다.
성벽 안쪽에는 125개에 달하는 군포가 구축되어 있다.
군포와 군포 사이에는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둔 매염터와
숯을 묻어둔 매탄터가 있었고, 성 내에는 유사시에 대비하여
충분한 식량과 군수물자가 보관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엔 길이 평이해 어린이들이 부모와 함께 쉽게 찾을 수 있다.
어린이들이 남한산성 행궁 앞에서 뛰놀고 있다.
<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의 규모를 본성 성벽의 안 둘레는 6,290보로
17리 반(7,854m)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95보(9,108m),
5개의 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군데의 군포, 4군데의 장대가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은 본성 외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 신남성 등도 축조돼 있다.
<남한지>에는
남문인 지화문.
남한산성 성곽 따라 한 바퀴 돌면서 유적지를 조목조목 한 번
살펴봤다.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남문에서 서문을 향해서
출발해서 원점회귀 하기로 한다. 남문은 지화문(至和門)이다.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는 문이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나온 문이기도 하다.
“동설(凍雪)이 이 같으니 군민(軍民)이 다 죽겠구나. 내가 친히
노천에서 빌리라. 이 외로운 성에 들어와 믿는 것이란 하늘뿐
이온데, 눈비가 이 같으니 형세가 얼어죽을 것만 같소이다.
제 한 몸 아까울 것이 없사오나 백관만성(百官萬姓)이 무슨
죄이오리까. 바라건대 잠깐 개이게 하사 우리 군민을 살리소서.”
동문인 좌익문.
<중정남한지>에 나오는 당시 인조가 하늘을 향해 한 말이다.
인조는 결국 1637년 1월30일 무릎을 꿇고 읊조리듯 항복을
선언한 치욕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길을 걸으면서 잠시 치욕의 역사를 떠올려보는 상념에 젖는다.
곧이어 영춘정(迎春亭)이다. 봄을 맞는 정자인데, 지금은 한창
공사 중이다. 봄은 봄이다. 산보객들로 넘쳐난다.
평이한 성곽둘레길이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붐빈다.
북문인 전승문.
제6 암문(西暗門)이 눈앞에 있다. 암문은 성문의 한 종류로, 일반
성문과 달리 외부에서 관측이 잘 되지 않은 은폐된 곳에 출입구를
마련하여 이용했다. 남한산성의 특징 중 하나가 우리나라 성곽 중
가장 많은 암문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성곽의 규모가 크고
굴곡이 많은 지형과 성외부에 외성이나 포대, 옹성 등과의 원활한
통행을 위해서다. 남한산성에 현재 남아 있는 암문은 모두 16개.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 등이다. 서암문은
그 중의 하나다. 너무 많아 이름 붙이기 쉽게 아예 번호로 매겼다.
제2암문과 제6암문만 개구부(開口部)가 평거식(平据式)이고,
나머지는 전부 홍예식이다. 제6 암문은 인조15년(1637)1월23일
한밤중에 습격해온 청병을 크게 물리친 곳이라 하여,
이 부근을 ‘서암문 파적지’라고 부른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드디어 남한산성 최고봉인 청량산(靑凉山․
GPS 506m)에 다다랐다. 청량산은 옛날엔 남한산, 또는 한산이라
부르기도 했다. 고지도를 보면 가끔 이런 지명이 등장한다고
남한산성문화사업단 최동욱씨의 설명이다.
서문인 우익문.
남한산성 최고봉 청량산에 수어장대(守禦將臺)가 있다. 장대는 전쟁
때나 군사훈련을 위해 마련한 장수의 지휘소를 말한다. 성내의 지형
중 높은 곳으로 지휘나 관측이 용이한 곳에 설치한다. 간혹 성내
넓은 대지에 병사들의 훈련을 위해 마련한 경우도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각 방향에 장대를 두었고, 후대에
외성인 봉암성에도 외동장대를 두어, 5개소의 장대가 있었다.
수어장대는 당초에는 단층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 복층으로 증축하면서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
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했다. 무망루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다.
남한산성 최고봉인 청량산에 있는 수어장대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바로 옆에는 청량당이 있다. 이곳은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하게
죽은 축성담당자였던 이회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의 두 부인과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이어 서문인 우익문(右翼門)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다.
동문을 좌익문(左翼門)이라 부르는 반해 서문을 우익문이라고
정조 때 명명했다. 서쪽 사면은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동장대터에 등산객이 이정표를 쳐다보고 있다.
서문을 지나자 봄의 절정을 알리는 철쭉이 만발해 있다.
봄은 봄이다. 삼삼오오 등산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더욱 힘이
넘치는 듯하다. 철쭉 사이로 매탄터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숯을 묻어두었던 자리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숯도 남한산성에서
중요한 물자 중의 하나였다. <남한지>에는 숯을 묻어두었던
곳이 94곳에 24,192석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흔적만 남아 있는 남장대터.
제5 암문, 즉 연주봉옹성 암문을 지나치고 있다.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되는 통로다. 서쪽에는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북쪽으로는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의 성벽을 말한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요충지에
대한 거점 확보를 위해 성벽에 덧대어 설치한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서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다.남쪽에 제1,2,3남옹성,
북쪽에 연주봉옹성, 동쪽에 장경사신지옹성이 설치돼 있다.
북장대터 주변에 등산객이 쉬고 있다.
북문인 전승문(全勝門)까지 0.8㎞라는 이정표가 보인다.이정표에는
없지만 그 직전에 북장대터가 흔적으로만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장대는 수어장대뿐이다.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 했다.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열고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했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전투’라고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때 이를 잊지 말고
앞으로는 꼭 승리하자는 의미로 전승문이라 한 것으로 전한다.
남한산성 축성 당시의 여장이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여장의 모습.
500여m 지나면 제1군포터가 기다린다. 군포는 성을 지키는
군인들의 초소다.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125개의 군포가 있었다. 현재는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로 보이는 작은 건물지만 남아 있다. 주변에는 많은 양의
기와편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제4암문인 북암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다. 이 문은 북문의
보조기능을 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1㎞정도 내려가면 하남시
상사창동에 도달하게 된다. 그 옆에 제2군포터도 있다.
제3암문인 봉암성암문도 300m 못 가서 잇따라 있다. 봉암성암문은
다른 문에 비해 제법 크다. 봉암성은 본성의 동장대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일명 봉암) 일대에 쌓은 외성을 말한다. 벌봉은
해발 512.2m로, 남한산성 정상인 청량산보다 높다. 남한산성의
외성에 있고 다른 봉우리이기 때문에 청량산이 남한산성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벌봉에서는 남한산성의 서쪽 내부와 동벽이
넓게 조망된다. 봉암성에도 모두 4개의 암문과 2개의 포대 및
치성 등이 구축되어 있다. 봉암성암문은 또 본성과 봉암성을
연결하는 주출입구로 매우 큰 편이다.
연무관의 모습.
곧이어 나온 동장대터도 GPS로 해발 513m다. 벌봉이 바로 앞에
보인다. 벌봉을 마주보는 본성 성벽이 여장(女墻)이다.
여장이 훼손된 채 보존되고 있으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여장은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이곳에 몸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남한산성 여장은
하부는 석재로, 상부는 다른 성곽에서 보기 드문 전돌로 축조했다.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등이라고도 한다.
장경사지신지옹성이 남한산성 외벽으로 축성돼 있다
남한산성군포지를 지나 제2암문인 장경사신지옹성암문이
연이어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으로
연결된다. 다른 암문은 본성 축조 시 함께 만들어져 사전에 계획된
반면, 이 암문은 장경사신지옹성을 쌓으면서 신축한 암문으로
보인다. 또한 한봉성과 봉암성의 방어를 주목적으로 설치했다.
한봉성은 동문 밖으로 봉암에서 남쪽으로 약 12㎞, 본성
동문에서 동쪽으로 0.8㎞지점에 위치한 한봉을 연결하는 성곽이다.
이윽고 장경사에 도착했다. 인조2년(1624) 남한산성을 고쳐 쌓을 때
승려 벽암각성을 팔도 도총섭으로 삼고, 전국의 승려들을 번갈아
징집하여 성을 쌓게 했다. 축성 후에도 승군들이 주둔했다.
장경사는 이들의 숙식을 위해 인조16년(1638)에 건립한 절이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승군제도가 없어질 때까지 전국에서 뽑힌
270여명의 승려가 교대로 산성을 보수하거나 경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무인카페도 있고, 걷다가 제법 쉬어갈만하게
조성돼 있다. 앞에는 주차장도 있다.
남한산성은 남녀 데이트코스로 이용될 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즐겨 찾는 등산코스다.
장경사암문도 지척거리에 있다. 다른 암문들은 우측의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공격을 대비한 반면, 이 암문은 좌우 성벽을
돌출시키지 않았다. 바깥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점점 더
넓어지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암문을 나가 제16암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을 따라갈수록 남한산성이 천혜의 요새라는 사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남한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하긴 오죽 했으면 ‘천작지성’이라 했을까 싶다.
외국인도 남한산성을 찾아 노송과 함께 성벽을 따라 걸으며 서울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좁은 성벽사이를 지나다 송암정터(松岩亭址)라는 이정표가 나온다.
송암정은 우리말로 ‘솔바위 정자’란 뜻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남한산성 일대는 수도권 최대 소나무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모양의 소나무가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지막 성문인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옆으로는
조그만 계곡이 있다.
포곡식 산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산성 내 도로로 인해 성벽이 단절된 유일한 구간이기도 하다.
도로를 건너야 성벽으로 계속 갈 수 있다.
그런데 보통 동쪽이 오른쪽이고, 서쪽이 왼쪽인데, 남한산성은
거꾸로다. 이는 한양 도성에서 봤을 때 왼쪽이 동쪽이기 때문이다.
동문은 낮은 지대여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도로를 건너 제11암문인 동암문으로 향한다. 조선 말 천주교
박해 때 희생당한 시신이 이 문을 통해 버려져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어린이를 데리고 남한산성을 찾은 부모들이 걸으면서 자연생태체험을 겸하는 학습효과를 거두고 있다.
다시 잠시 가파른 길로 연결된다. 남쪽은 특히 가파른 구간이 많다.
제10암문, 제3남옹성, 제9암문, 제2남옹성, 제8암문, 제7암문,
제1남옹성을 연이어 지난다. 제2남옹성 부근엔 남장대터와
제2 남옹성치도 있다. 치(雉)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시설물 중의 하나다. 산성의 경우 지형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굴곡을 이루게 되어
별도의 치가 필요 없는 경우도 많았다.
애초 출발했던 남문이 저 앞에 보인다. 원점회귀다. GPS로 거리를
측정해보니 8.6㎞가 나온다. 순수하게 성곽둘레만의 거리다.
외성까지 포함하면 10㎞는 훌쩍 넘을 것이다.
남문에서 남한산성 종(鍾)이 있는 자리인 종로 행궁으로 향한다.
행궁은 남한산성과는 별도로 사적 제480호로 2007년 지정됐다.
한양 도성 외에 유일하게 행궁이 있는 곳이 남한산성이다.
행궁은 임금이 한양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병자호란 때의 인조 외 숙종․영조․정조․철종․
고종 등이 여주, 이천 등의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했다고 전한다.
행궁 입구 현판은 한남루(漢南樓)다.
이는 한강 남쪽 성진(城鎭)의 누대라는 뜻이다.
남한산성엔 이 외에도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당시
책임자였던 이서의 영혼을 함께 모시고 음력 9월5일 제사를 모시는
숭렬전, 병자호란 때 적에게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는 현절사,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침괘정,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연무관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출처:박정원 박정원 님의 블로그 마운틴 blog.chosun.com/pichy91
Ernesto Cortazar / 주옥 같은곡 연속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