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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聖者' 노무라 목사 -만물상/waple club-Hero

by joolychoi 2013. 11. 8.

 

 

 

 

 

 

모습 

  '청계천의 聖者' 노무라 목사 
입력 : 2013.10.29 03:03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

 

1974년 마흔세 살 일본인 목사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청계천 하류 개미마을에 갔다. 지금 군자차량기지 부근 둑 아래

땅을 파고 얼기설기 지은 움막집들에 1600가구가 살았다.

청계천 따라 6만명이 살던 빈민촌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었다.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간 쪽방에 열댓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에 드러난 하얀 뼈에 파리떼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소녀의 어머니는 병원 갈 엄두도

못 낸 채 무당을 찾아다녔다.

 

▶노무라 목사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소녀는 눈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노무라는 "예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졌고 노무라가 찍은

사진 속에 남아 있다. 그가 1970년대 청계천의 밑바닥 삶을

담은 사진 500여장으로 지난주 사진집 '노무라 리포트'를 냈다.

그는 1984년까지 한국을 쉰 차례 넘게 드나들며 빈민을 도왔다.

그는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청계천 빈민도 없었다"고 믿는다

 

[만물상] '청계천의 聖者' 노무라 목사
▶노무라 목사는 도쿄 집을 팔아 청계천에 탁아소를 지었다.
남양만 간척지로 옮겨간 철거민이 키우게 하려고 뉴질랜드
종자 소 600마리를 사오기도 했다. 80년대까지 한국으로
부친 돈이 7500만엔, 8억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야마나시현
산골에서 가정 교회를 꾸리고 있다. 기증받은 헌옷을 입고
사는 검소한 삶이다.

▶노무라 목사는 작년 2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무릎 꿇고 일본군위안부 동원을 사죄했다. 함께 청계천

빈민 구제를 했던 제정구의 13주기(周忌) 추모식에 온 길이었다.

그는 플루트를 꺼내 가곡 '봉선화'를 연주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애환을 담은 이 노래가 위안부 할머니들께도 위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에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에 사죄하라고 했다. "일본에 역사의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고 했다.

 

▶그는 일본 우익들로부터 협박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린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지 않을 뿐, 지난 역사에서 가해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는 양심적 일본인이

더 많다"고 했다. 그가 어제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시청에서 '노무라 할아버지의 서울 사랑' 사진전도 열었다.

여든두 살 노무라 목사는 죽어 한국에 뼈 묻기를 소원한다.

"한국은 내 인생의 기반이었고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소명(召命)의 땅입니다." '청계천 빈민의 성자(聖者)'에게

건네는 우리의 감사(感謝)가 너무 늦었다.

 

출처: /waple club-Hero

blog.choseu.com/waple 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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