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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10. 총 담 (叢 談 ) [1]

by joolychoi 2013. 10. 26.

 

 

 

  

세덕총람 (世德叢覽) 
 
     周德齋[始祖 文成公 齋閣]  
 
10.총 담 (叢 談 ) [1-1] 
 
ㅇ 전주 최씨 세헌(全州崔氏世獻)
 
우리 최씨는 문성공으로 부터 아래로 수백년에 걸쳐 덕학문장(德學文章)과
과관훈업(科官勳業) 그리고 의행특적(懿行特跡)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다고
국승야사(國乘野史)와 제현의 장갈(狀喝)에 쓰여저 있다.
훌륭한 후손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으나 각 파의 집단들이 산재하여 있어서
한 자리에 모여 볼 수가 없다.더구나 세도(世道)가 날로 변화하여 가니 조선들의
형적(形蹟)이 없어져 버릴가 두려워 문중의 연노(年老)들이 이를 항상 한탄
하면서 여러번 경영하려 하였으나 미쳐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
 

지난봄 도산재(道山齋)에서 모여 족장인 종호(淙鎬),문환(文煥) 양공이

논의를 주장하고 용호(庸鎬),홍락(弘洛),양섭(養燮),병우(炳羽),병돈(秉敦)

제공이 이 일을 나누어 맡아 집안 역대에 걸쳐 소장하여 온 여러 글들을

모아 8권 4책으로 하여 이를 세헌(世獻)이라 이름 하였다.

 

이것이 비록 각 집안에 소장된 모든 글들을 빠짐없이 모아 책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의 자료가 수집되었기에 진주에 있는 인쇄소에서

활판 제본하고 보니 책값이 호대(浩大)하여 집집마다 봉장(奉藏)치 못함을

한탄할 따름이다.시조 이하 직계 자손들의 글을 한 책으로 엮으니 위에서

말한 기이한 사적과 특별한 행적이 거의 두 책이다.

 

이것이 비록 모두 3권에 불과하지만 조상을 섬기는 의리로 갖춘 이 책에서

직접 실천하였던 아름다운 행적을 보고 있으면 조선을 직접 대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므로 장차 부지런히 힘썼던 조선님들의 사적으로 하여금 밝은

빛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 최씨는 이 일을 하였기에 아름다운

발자취를 세상에 남겼다고 하니 어찌 우리 문중에 있어서

큰 다행이 아닐수 없다고 하겠다.(龍門草稿)

 

(주)이 세헌(世獻)을 2001년 3월 전주최씨 안렴사공 서울종친회에서

2권으로 국역 발간하면서 그 이름을 “ 국역 전주최씨세헌록 안렴사공파편

(國譯全州崔氏世獻錄安廉使公派編“ 으로 제호(題號)하였는데 이 중

“세헌록”을 원본대로 “세헌(世獻)” 으로 표기함이 옳다고 본다.

 

O 회오리 바람에 강 못 건너

 

시조 문성공 아(阿)의 6세손인 응교 최수지공(崔水智公)은 강주(康州)에

살았으니,비안에 재(宰:군수)로 있을 때에 선산(善山을 겸임하여 해평현에

내왕하면서 강산의 좋은 경치가 있는 것을 보고 가려서 살았다.

그의 장자 군수공 최이식(崔以湜)이 아직도 강주에 있더니, 이때에 와서

해평에 따라서 이사하고자 하여 낙동강에 이르러서 회오리 바람을 만났다.

이 바람 때문에 배로 건너 갈 수가 없게 되자, 이식공은 아버지의 명령이라

이르고 단념하지 않은채 왔다가는 다시 가기를 3번이나 하였으나 풍랑이

처음과 같으므로 끝내 건너지 못하고 말았다.(진양속지)

 

O문과 군수공 최이식(崔以湜)의 묘 실전(失傳)

 

최이식공(崔以湜公)은 시조 문성공 아(阿)의 7세손이고 윤옥공(潤屋公)은

군수공의 장자이다.진주 강주촌에서 함안 안인으로 이거하였는데 군수공의

묘가 실전되어 구만면 화촌 도산서원 경내에 설단 향사하다가 지금은 당산

옥산재 경내의 선세단각에 단비를 옮기고 옥산재에서 선세합사하고 있으며

윤옥공은 무후하고 실묘하였다.

 

그런데 함안군 산인면 내인리 입로(入路)에 고총 2기(基)가 있다. 그 중 1기의

상석에 「문과 행 함안군수 전주최공 휘 이식 지묘 종손 운봉(文科行咸安郡守

全州崔公諱以湜之墓宗孫雲鳳)」이라 하고, 다른 1기의 상석에는「처사 전주

최공 휘 윤옥지묘 배 함평모씨 묘 실묘(處士全州崔公 諱潤屋之墓配咸平牟氏

墓失墓)」라 하였다.그리고 이 2기의 묘 옆에는「이조 문과 함안군수 전주최공

휘 이식 지묘(李朝文科咸安郡守全州崔公諱以湜之墓)」라 쓴 큰 돌 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 「민정을 순시하며 직무를 수행하던 중 과로로 순직하시니 모든

군민이 찬탄 애통하여 마지 않았다.」라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서 많은 자손들로 하여금 올바른

판단으로조상에 대한 불경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해 두어야 한다.

 

먼저 군수공의 묘는 1686년 이후 몇 차례 발간된 족보에「실묘하여 도산원

(道山院)에서 단향(壇享)한다.」하였고, 윤옥공의 묘에 대하여는

한 자의 기록도 없으니 실묘(實墓)라 할 수 없다.

다음 종손 운봉(雲鳳)은 군수공의 맏아들 윤옥공의 후로 계승하였다는데,

족보에는 무후이고 남명문집(南冥文集)에도 무후로 기록되어 있으니

후손이 없는데 종손이 있을 수 없다.

 

끝으로 군수공이 함안군수로 순직하였다는데 함안군지(일명 함안향안)에는

역대 군수 명단에 없으니 신빙성이 없다. 따라서 이상의 사실은 우리

종중에서도 모르는 일인데 행여나 후손들이 이를 사실인양 오인할까

걱정되어 몇 자 적어둔다.(옥산회보)

 
10.총 담 (叢 談 ) [1-2]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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