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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10. 총 담 (叢 談 ) [1-3]

by joolychoi 2013. 12. 7.

 

 

 

  

세덕총람 (世德叢覽) 

始祖 文成公 墓所 

 

10.총 담 (叢 談 ) [1-2] 에서 계속 
10. 총 담 (叢 談 ) [1-3 ] 
 
 O 농사꾼의 행운
전주인 최중길(崔重吉 18世)은 조선말  철종 때 두영(斗陽)에 살았다. 
체구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나 그 힘을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
성품은 부드럽교 착하며, 매사에 성실하고 정직하여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릴때 부터 안걔(安溪) 하일성(河一聖)의 집에서
머슴갈이를 하였다.주인 하싸는 그의 사람됨을 알아 보고 뒷날 사위로 삼았다.
신혼살림을 차렸으나 살림집이 남의 아래채 외양간 옆방이 었다.
밤에는 소가 벽을 툭툭처서  잠을 잘수가 없엇다. 최씨는 한이 맺혀 부지런히
일하여아껴사 돈을 모을것을  결심하고 " 우리부부가 이를 악물어 일 하여서
돈을 모아 장차 이집을 우리 집으로 만들자."고 부인과굳은 약속을 하였다.
남편은 남의 집 머슴살고 부인은 길쌈으로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정말
그 주인 집을 사고 말았다.
 
그후 공은 북천면(北川面)으로 이사를 하였다. 집도 사고 논도 사서 이제는
살기가 많이 나아졌지만 생활태도는 가난할 때나 변함없이 근면하고
검소하였다.농사철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가 되면 잔교장(辰橋場),하동장
(河東場)으로 쌀 1섬을 지고  가서 팔았다.
그 날도 쌀을 1섬 지게에 지고 하동장으로 향하였는데, 황토재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서 지게를 길 가에 받쳐놓고 길 아래 골짜기에서
대변을 보는데,오줌이 떨어지는 황토속에 커다란 엽전 뭉치가 나타났다
최씨는 떨리는 손으로 돈 뭉치를 지게 위에 얹고 가다가 짐이 너무 무거워서
솔밭속에 묻어 두고 하동장으로 갔다.어떤 날은 쌀이 안팔려종일 기다렸다가
파장에 겨우 헐값에 주고 오는 날도 많았는데, 그 날따라  금방 쌀이 팔렸다.
오늘 길에 피묻어 두었던  엽전 뭉치를 찾아 왔다.
최씨는 횡재한 그 돈으로 논도 사고,밭도 샀다.부부는 더욱 노력하고 아끼고
재산을 모아서 당대에 799여석의 부호(富豪)가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최ㅣ의 그 근면하고 성실함에 하늘이 도와, 최씨는 이 많은 재산을 모은
일 보다도 더 훌륭한 아들 둘을 두었다.
 
조선말 강우(江右)에서 큰 스승과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
귤하공(橘 下公) 최식민(崔植民)(1831~1891)과 계남공(溪南公) 최숙민(崔琡민)
(1837~1905)이 그들이다.귤하공(橘 下公) 최식민(崔植民)(은 큰 학자로 그 이름이 널리
퍼졌다. 계남공(溪南公) 최숙민(崔琡민)은 재주가 뛰어나고, 특히 용모가
출중하였으며,어려서 경사(經史)와 제자서(子書)를 두루 읽고
통달하였으나, 과거 공부를 마다하고 오직 성현의 경전에만 전념한
독학(篤學)의 선비였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에게 배웠고,
많은 제자를 가르쳐 그 명성이 영호(嶺湖)에  높았다.
 
이 고장에서 맨손으로 시작하여 재산을 모우고 아들 둘을 그렇게 크게 길러낸
사람으로 최중길 만한 이가 없을 것이다. 재산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도
몸소 성실하고  검소한 자세를 실천해  보이면서 자녀를 가르치고
 키워낸 그 모습은 후세에 큰 교훈이 될것이다.(구미문학)
 
(주)최중길(崔重吉 18世): 모산공 최기필의 7세 손이고 남포공 최주국
(崔柱國) 종손(從孫)
10.총 담 (叢 談 ) [1-4]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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