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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8.主要人物-14)효자(孝子)효행(孝行)[8]-東幹22世-東立-奫鎭-重鎭-成烈22世

by joolychoi 2013. 4. 11.

 

 

  

세덕총람 (世德叢覽)  
  8. 주요인물(主要人物)   

14) 효자(孝子) 효행(孝行)[8]  

 
ㅇ 동간(東幹 22世)
호는 송재(松齋)이고 유일 최익공(崔瀷公)의 자이다.
성품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상을 당해서는
빈소를 잠시라도 떠나지 않았다.(환여승람)
(주)최동간(崔東幹):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상억공(崔祥嶷公)의 손
 
ㅇ 동립(東立 22世)
호는 오송(五松)이고 유일 최익공(崔瀷公)의 자이다.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 섬김이 극진하였다. 부친이 만년에
눈이 멀어지자 식사때 마다 나아가 반드시 손가락으로 여쭙고 상중에는
예를 다하였으며 춥거나 더위를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를 했다.
극진한 정성과 맛있는 음식으로 효를 다 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잠시도 빈소를 떠나는 일이 없으며 백형과 침식을 같이하며 애훼(哀毁)하였다.
백형이 돌아가시니 장송 상례에 부모상을 치루듯 한결같이 예를 다하니,
사람들은 그의 효우에 감복하였으며 벼슬은 도정(都正)에 이르렀다.(환여승람)
(주)치동립(崔東立):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최상억공(崔祥嶷公)의 손
 
ㅇ 윤진(奫鎭 22世)
호는 춘오(春塢)인데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첨추공 최광언(崔光彦)의
증손이다.성실한 덕행과 지극한 효행으로 명성이 늘 났으며 좌승지에
증직 되었다.(고성지)
 
ㅇ 중진(重22世)
자는 응협(應協)이요 호는 일관재(一貫齋)이며 혜정공 최수강(崔秀岡)의
후이고  최상각공(崔祥珏公)의 손이다. 효우 돈독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백형의 뒤를 잇게하고 차남은
옛 생가의 족부(族父)의 후사로 출계토록 하라는 친명(親命)이 내리니
모두가 말하기를 " 이미 중년을 넘긴몸인데 하나 남은 아들까지 남에게
보내면 본인은 후사를 이을 수 없게 되지 않느냐?" 고 하므로 공은
"천명인데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내 아직 젊으니 후사를 볼수 있을
것이다." 라고 태연히 말 하였는데 과연 곧 득남하니 사람들은 하늘의
감응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성지)
 
ㅇ 성렬(成烈 22世)
일 휘는 진석(辰碩)이고 자는 사숙(士淑)이다. 공의 두형은 서당에서
글 공부를 하였으나 공은 가난 때문에 수학하지 못하고 밤이면 형들의
글 공부를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힐 뿐이였다.
1952년(임진) 중형인 진열공(振烈公)이 쓴 가첩에 의하면「 비() 진양
강씨에게 병이 위중하여 절명 직전에 이르지 공은 단지주혈(斷指朱血)하니
소생하여 10년을 더 생존하였다. 이 효행이 진주 동부 5개면에 널리 알렺지자
향당(鄕黨)에서 모두 극진한 ㅎ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라  하였다.
공은 성품이 원만하여 부모 섬김을 보람으로 생각하면서 논사일에 전념하고
근검 성실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농(富農)으로 가세(家勢)를 이루었다. 
조상 섬김도 유달라서 고성 청광과 구만 선동 일대의 선산(先山)을 진주
사봉면으로 이장하고, 일부는 마산시 진전면 시락리 해변 명당을 찾이
이장하여 치묘(治墓)로 가운흥기(家運興起)를 꾀하면서 근면 성실하고
효우 돈독에 소홀함이 없었다.(최경규)
(주)최성렬(崔成烈):충순위공 최윤재의 후이고 동정공 최병철(崔秉喆)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