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어와 홍어 요리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문어숙회와
삭힌 홍어는 내륙에서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문어를 삶아 얇게 썰어 간장이나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문어숙회는 문어의 최대 소비지인 안동이나 영주에 가야
맛볼 수 있다. 울진 등 해안 지역에서는 싱싱한 문어를
삶아서 바로 먹는다.반면 경북 내륙에선 삶은 문어를
냉장고 등 서늘한 곳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 숙성시켜 먹는다.
대단찮아 보이는 이 숙성이 큰 맛 차이를 낸다.
삶아서 바로 먹었을 때는 부드럽고 촉촉하기만 하지만,
숙성시키면 물이 빠지면서 육질이 한층 쫄깃해지면서
더욱 깊고 복잡 미묘한 감칠맛을 품게 된다.
막 삶은 문어가 잘 버무린 겉절이라면, 숙성시킨
문어숙회는 제대로 익은 김장김치 정도의 차이랄까.
처음부터 일부러 숙성시켰다기보단 삶은 문어가
태백산맥을 넘어오는 동안 자연 숙성됐고
요리 과정의 하나로 정착된 듯하다.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는 홍어를 삭혀 먹는 생선으로 알지만,
전라도에 가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흑산도에서는 홍어를 삭히지 않고 회로 먹는다.
반면 목포에서는 홍어를 살짝 삭혀서 먹는다.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올라가면 도착하는 나주에선 '징하게' 삭힌
홍어를 비로소 만나게 된다.이런 차이는 예전부터 그랬던 듯하다.
흑산도 유배 당시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Z山魚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홍어를 썩혀 먹는 것을 좋아하니, 지방에 따라 음식을
먹는 기호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홍어 삭힘 정도의 차이가 생겨난 원인은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말 왜구들이 흑산도 일대 섬들을 노략질하는 일이
잦았다. 정부에서는 피해를 막으려고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흑산도 주민들이 육지로 이주한 곳이 나주
영산포였다. 지금은 댐으로 강 입구가 막혀있지만 옛날에는
돛단배로 열흘에서 보름이면 흑산도를 출발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영산포에 닿았다. 흑산도 사람들은 항해 기간 먹을거리로
홍어를 실었던 모양이다. 냉장 시설이 없던 당시로선 홍어가
긴 항해 동안 그나마 덜 상해서 먹을 만한 생선이었다.
상온에서 열흘이면 홍어가 자연 발효되기에 알맞은 시기였고,
그렇게 해서 삭힌 홍어가 나오게 됐다는 게 일반적인 추측이다.
문어와 홍어는 부패가 더디다는 장점 덕분에 내륙 지방에서도
사랑받게 됐다. 운반 과정에서 자연히 또는 우연히 숙성된 것이
각각의 가장 독특한 식감을 지니게 됐다. 그러면서 문어숙회는
경북 내륙의 유교·선비 문화와 그 식감을, 삭힌 홍어는 전라도의
깊은 맛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언뜻 달라 보이지만
먹거리와 사람들이 먹고사는 모습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