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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정약용(丁若鏞) 산문집(散文集)

by joolychoi 2013. 1. 26.

 

 

 

정약용(丁若鏞) 산문집(散文集)

 

                       정약용 영정사진

                       정약용 동상


 

 

정약용(丁若鏞) 1762-1836년.

조선 후기의 학자 호는 다산(茶山) 광주(廣州) 출신 정조 즉위년에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을 통해 성호(星湖)이익

(李瀷)의 유고를 보고 감명을 받아 사숙하였고 정조 7년에 경의 진사가

되어 정조 임금을 만나 중용(中庸)을 강의 이듬해 이벽을 통해

서학(西學)에 접하여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동 왕 14년에 남인 공서파의 탄핵으로 해미에 유배되었다가 10년 만에

풀려나와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 승지를 거쳐 병조 참외에 이르렀으나

주문도 사건 때문에 둘째 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 좌천 당했다.

 

정조 21년에승지에 올랐으나 천주교 신앙 협의로 자명소(自明疏) 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으나 반려되었고 다시 입경하였으나

계속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정조가 죽은 후에는 장기 강진

등지에 유배 이후 8년간 학문에 몰두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제,유포,

대동,수경 ,주역, 심전, 역학, 예언, 대학 ,회의등 508편에 달한다.

 

다산 정약용이 아들에게 당부하기를,

독서(讀書)야 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깨끗한 일이다.

또한, 외진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가 없고 호사스런

부호 가의 자제들은 그 맛을 알 수가 없다

오직 벼슬아치 자제로 어려서부터 보고 듣고 중년에 재난(災難)을

만나 너희들 처지와 같은 자라야 비로소 독서 할 수가 있다.

 

너희가 끝내 배우지 않고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면 나의 저술과

간추려 뽑아놓은 것들을 장차 누가 모아서 책으로 역고 바로잡아 보존

하겠느냐?,

너희들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면 내 글이 끝내 전해 질 수가 없겠구나

내글이 전해지지 못한다면 후세 사람들이 다만 사헌부의 탄핵 문과

재판(裁判) 기록 만을 가지고 나를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 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느냐?,

 

너희는 아무쪼록 이점을 생각해서 분발하여 학문(學文)에 힘스라

나의 한가닥 문맥(文脈)이 너희들에 이르러 더욱더 커지고 왕성(旺盛)

하게 하여라

대학(大學)의 성의장(誠意章)과 중용(中庸)의 성신장(誠身章)을 써서

벽에 걸어 놓아라

큰 용기(勇氣)를 분발하고 다리를 튼튼히 세워 물살이 센 여울로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으로 성의 공부(誠意 工夫)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성의 공부는 가장 먼저 황당한 말 한마디를 세상의 큰 죄악으로 생각

하고 황당한 말을 하지않는 것부터 힘쓰야 할 것이다.

 

만일 암을 다시 고쳐 짓는다기에

 

열흘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 고치 집이고

여섯 달만 살고 버리는 집이 재비 집이며,

한해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 집이다.

그런데,

그 집을 지을 때는 누애는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재비는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며

까치는 열심히 풀과 볏짚을 물어 오느라고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 모른다.

이러한 모습을 보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지혜(智慧)를 낮게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자가 없다

 

그러나 붉은 정자와 푸른 누각도 잠깐 사이에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니 우리 인간들의 집 짓는 것도 이런 미물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백 년을 살다가 그 집을 버린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것은

없는데 하물며 목숨의 길고 짧음이 정해져 있지 않음에야 우리가

집에서 처자식을 잘살게 하고 후손에게까지 전해 준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할 것이 없는데 ,

하물며 스님의 처지에 집을 고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두운 스님이 그 집을 새롭게 손질하고 크게 준공되자

다산에 있는 내 집으로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이 고장에 있는 절만 하더라도 바둑판에 바둑알을 벌여 놓은 것만

같아서 가는 곳마다 내 집 아닌곳이 없습니다.

게다가 내 머리까지 다 빠져 늙은이가 되었는데 아무리 내가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다만, 이 집을 잘 손질해서 후세 사림들에게 남겨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말을 착하게 여겨 이 글을 지었다

 

그 집 이름을 물어보니 두륜산(頭輪산) 만일암(挽日庵) 이라고 하였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신중하게 하고

사방에 나를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경계하라.

지나간 것을 쫓을 수 없고 다가올 일은 기약할 수 없으니 천하에서

자기가 지금 부여받은 처지(處地) 처럼 즐거운 것은 없습니다.

맹자(孟子)는 몸을 지키는 것이 제일 크다고 하였다.

 

우후(虞候)는 중협과 해어지면서 쓴 시(詩),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니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니

즐거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의 서로 낳는 이치는

동(動),정(靜), 음(陰)과 양(陽)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이다.

사리를 통달(通達)한 사람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서 살피고 승제(乘除)

의 운수를 헤아린다.

어떤 상황에 대응하면서 자기의 마음아 언제나 다른 사람의 마음과

서로 반대(反對)가 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두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줄이게 된다.

 

흔하면 비싸게 사들이고 귀하면 싸게 팔아서 물가를 항상 고르게 하는

겅수창의 상평법(常平法) 처럼 한다.

이게 바로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다산의 산문(散文)을 보는 사람마다 관심이 다르고 평가가 다르겠지만

나는 그가 지은 수백 권의 글 가운데서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제일 사랑한다.

천주교(天主敎) 인으로 몰려서 온 집안이 결딴난 뒤에도 앞길이

끊어진 자식들에게 글을 읽어야만 사람이 되고 아버지의 억 욱함을

풀어줄 수 있다고 설득하는 편지들은 지금 읽어도 눈물겹다.

 

과거볼 기회조차 빼앗긴 자식들이 무슨 희망으로 글공부를 하고

싶겠는가?.

이러한 편지는 자식들에 대한 설득이다 못해 눈물겨운 호소

이기도 하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 자식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달랬을 것이다.

그러한 집념이였기에 그는 유배지에서 수백 권의 책을 지어 우리

문화사를 빛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산의 글 가운데 어찌 이러한 편지들 만이 그의 대표작이랴

다만 나는 그의 글에서 인간미를 찾아내기 시작한 발단이었을

뿐이다.

정약용 산문집의 요점을 정리 해본것입니다.

다산 정약용 생가

다산 묘소

숙부인 묘소

다산 문화관

.

 

이생강=대금연주-팔도 아리랑

 

가져온 곳 : 
블로그 >조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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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조헌섭|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