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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 돕는 아버지 싫었지만 쪽방촌 보니…"

by joolychoi 2012. 12. 6.

 

 

 

 

 
 
 
  
  "남만 돕는 아버지 싫었지만 쪽방촌 보니…"
 
 
代이어 서울역 노숙인 쉼터·교회 운영… 열매나눔재단 김범석 사무총장
"父親께 물려받은 건 가난·쪽방촌 사역뿐이지만 큰일 이루는 씨앗이라 여겨
밥만으론 안돼, 일자리 줘야 희망을 가질 수 있어요"
 

김 목사는 1996년 말 '쪽방동네 거지왕초'로 유명한 아버지 김흥용(73)

목사가 30년 직장 퇴직금 3000만원으로 용산 쪽방촌에 목욕탕 겸

쉼터인 나사로의 집을 만들 때부터 함께했다.

건물 옥상에 비닐하우스로 교회도 지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신학자가 되고 싶어 대학을 다녔는데,

1997년 초 형의 사업이 부도가 나며 유학의 꿈도 접어야 했다.

낮에는 과일장사를 하고, 밤에는 아버지를 돕는 생활이 이어졌다.

"신학자의 길을 포기할 때, 열등감, 패배감도 심했어요.

하지만 '쪽방촌 노숙자 분들에게는 설교할 수 있다'며

마음을 다잡았죠."

 

쪽방촌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씻고 닦아도 몸에는 퀴퀴한

냄새가 뱄다. 만취해 행패 부리는 사람 만나긴 일상 다반사.

동네 파출소에선 술 취한 쪽방촌 주민 신고가 들어오면

으레 나사로의 집 앞에 실어다 놓고 가곤 했다.

 

열매나눔재단이 있는 서울 명동에서 만난 김범석 목사. 그의 아버지 김흥용 목사는‘쪽방동네 거지왕초’로 널리 알려진 서울역 뒤 쪽방촌‘대부’다. /이태훈 기자
 

"전엔 가난은 '성냥팔이 소녀' 같은 동화 속 얘기로

여겼던 것 같아요. 하지만 현장은 전혀 달랐죠.

혼자 죽은 뒤 썩는 냄새 때문에 발견된 시체를 수습할 때면,

거기에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없는 것 같았어요." 아프다는

사람은 병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했다. 더러운 사람은 씻겼고,

배고프다는 노숙자에겐 먹을 걸 줬다. 아버지와 아들이

중구와 용산구 쪽을 분담해 쪽방촌 상담소장으로 동역했다.

 

2002년엔 당시 '건물 없는 교회'로 유명했던

'높은뜻숭의교회' 교인들이 쪽방촌에 자원봉사를 오며

인연을 맺었고, 2003년엔 이 교회 사회선교 담당 전도사로

'스카우트'됐다. 교회의 사회봉사 사역과 쪽방촌 사역을

함께 돌보는 '양다리' 생활이 시작됐다.

 

"예전엔 밥 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했지만,

복지가 발달하면서 자활이 중요해졌어요.

'일자리를 줘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갖는다'고 생각했죠

."노숙인 직업교육과 창업 지원을 시작했다.

분식점 대리점, 차 흠집 수리점을 세워 노숙인

출신 사장을 배출했다. 2004년에는 중구 자활후견기관

사업을 따내 쪽방촌 자활사업을 전문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쪽방촌 주민 50여명이 그렇게 자활하는 걸 보며

교회도 김 목사의 노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2007년엔 열매나눔재단이 만들어졌다. 탈북자 자립을

위한 공장 5개를 세웠고, 베트남과 말라위 등 제3세계에서

'빵을 나눠주는 게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구호개발사업도 진행 중이다. '쪽방촌의 대부(代父)'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난과 쪽방촌 사역이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이다. 김 목사는 얼마 전 쪽방촌

생활 15년 경험을 담은 책 '역전 - 좁은길에서

만난 하나님'(두란노)을 펴냈다.

 

책 제목 '역전'은 쪽방촌 자활사업이 시작된

서울 '역전(驛前)'이기도 하고, 인생의 '역전(逆轉)'이기도 하다.

김 목사는 "친절과 도움이 '독(毒)'이 되지 않도록,

어디서 어떤 사역을 하든 자립과 자활이 최우선"이라고 했다.

 

"제가 '스펙'도 없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지만,'가난'은

잘 알거든요. '어떻게 하면 가난한 이들이 쪽방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도움받고 사는 데

익숙해진 아프리카 빈민들이 자립할 수 있을까'

늘 아이디어가 넘친답니다."

 

출처:   이태훈 기자

 

와플(Waple)은 현명한 사람(Wise People)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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