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에서 교장으로
―부임한 지 6개월이 지났는데 교장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졌나.
"지금은 부회장이라는 말이 더 낯설다. 교장 선생님이라는 말이 참 좋다."
―왜 하필 로봇고등학교 교장에 지원했나.
"은퇴 이후 기회가 있으면 로봇 산업 쪽에서 계속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로봇고 교장 제안을 받은 뒤 어차피 로봇 쪽 일을
하기로 했으니, 학교에서 로봇에 관련된 사람을 키우는 것도
좋은 길이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키운 애들과 나중에
산업 현장에서 동료로 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방인으로서 지난 6개월을 돌아보면….
"교육계가 사회·경제·산업 시스템과 간격이 많이 벌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동안 산업이 관 주도에서 스스로 발전해가는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동안 학교는 정체돼 있었고 정부가 바뀔 때마다 혼선과
난맥상을 겪은 것 같다.
조직이나 문화가 폐쇄적이고 지나치게 동질적인 체제가 구축돼 있었다.
지금은 그 틀을 깨는 것이 어렵다. 뭔가 자극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개방형 교장 공모도 도입한 것 같다."
―행정실에 부서 및 팀별로 월별 과제 진척 상황을 그래프로
그려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기업 출신 교장으로서 어떤 변화를
추구하고 있나.
"고객 만족과 책임 경영 등을 내걸었다.
학교의 고객은 학생과 학부모에 산업체까지 포함된다.
진정한 고객 만족은 학생의 인생을 개척하고 기업에 우수한 인재를
보내주는 것이다. 책임 경영은 학교도 목표를 세우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교사들이 그냥
주어진 일만 문제없이 수행하면 직장이 보장돼 왔는데
그런 자세로는 안 된다."
◇학교가 싫었던 소년
1970년 16세 소년 노태석은 대구의 한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자기 키보다 큰 사출기 압력 레버를 당겨 틀에서 플라스틱병이나
바가지를 만드는 공장이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아 아무리 당겨도
레버가 내려오지 않는 때가 많았다. 그는 "내가 처음 만난 세상은 힘겹게
당기던 그 압력 레버의 느낌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가난했던 시절 2남 2녀의 장남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당시 한 출판사에서 그가 상급 학교에진학하면 장학금까지 주기로
했지만, 그에게는 그마저도 사치였다.
노 교장은 "나는 학교 갈 돈이 아니라 먹고살 돈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검정고시로 고교 과정을 마치고, 이어 9급 공무원 시험,
기술고등고시 등을 거쳐 한국통신(KT의 전신)에서 일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받았다.
―장학금까지 확보했는데 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나.
"경제적으로 힘들었고, 무엇보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산다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고등학교 안 간다고 했다가 중3 때 담임 선생님한테 엉덩이도
많이 맞았다. 그렇게 학교를 싫어했던 사람이 교장을 하게 됐으니
인생의 아이러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
하는 것을 못 견딘다.지금도 틀에 박힌 강의 이런 것들을 안 좋아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했나.
"공장에 다녔고,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닥치는 대로 했다.
학교에 오니까 실습용 선반이 있던데 요즘 아이들은 만지기 싫어하더라.
그래서 내가 '너희만 할 때 만져본 것은 일생 손에 감각이 남아 있다'고
한 적이 있다. 나 역시 플라스틱 사출기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선반을 만졌던 감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검정고시를 본 것은 생각이 바뀌어서였나.
"친구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고 나는 공장에 다녔다.
그제야 '내가 여기서 뭐하나' 생각했다. 혹시 나중에 대학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조금이라도 중학교 시절 공부한 것이 머리에 남아 있을 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고졸 검정고시를 봤다. 아마 겨우 합격했을 것이다.
검정고시 붙고 나서는 대구 칠성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자격 연한 최연소인 18세에 9급 공무원(행정직) 시험에 합격했다."
―1970년대 사회는 중학교 졸업장만 가진 젊은이에게
가혹한 사회였을 것 같은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그때는 다 같이 가난했고 동료가 있었다."
―중학교만 나온 자식이 시장에서 장사하는 것을
부모님이 말리지 않았나.
"그 정도의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요즘은 중학교 2학년이 질풍노도의 시기다.
힘든 사춘기를 겪었겠다.
"못된 짓 하면서 청소년기를 지낸 것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내 진로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한국 남자들 고등학교 대학 군대까지
끝내고 20대 후반에 하는 고민을 나는 10대 중반부터 했던 것이다."
―공무원 생활에 안주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체질은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대학 나오면 공무원 시험 안 쳤다.
나는 우체국에 근무했다. 경제가 뜨면서 대학 졸업생들은
다 기업으로 갈 때였다. 그러면서 슬슬 나도 이제 대학을 가야 되나
이런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갔다."
―제대 후 기술고등고시에 합격했다. 시험의 달인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는 능했다. 80년 통신사무관 발령을 받았다가
한국통신이 공기업으로 바뀌면서 공무원에서 신분이 바뀌었다."
◇"취업을 먼저 경험하는 것도 훌륭한 자산"
―최근 '대학 가는 것이 더 손해'라는 말까지 나왔다.
"앞으로는 더 그럴 것이다. 작년만 해도 특성화고교 학생의 절반 정도가
대학에 진학했다. 특성화고 졸업생에게 대학에서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취업하겠다는 학생이
점차 늘고 있다. 학교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군대 다녀온 뒤 대학에 가도 된다. 오히려 부모들이 사회적
지위 이런 것 때문에 고졸 취업에 자긍심을 못 느끼는 것이 문제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은가.
"학부모들이 내 이야기를 들을 때는 솔깃한데 집에 가서 옆집
아줌마랑 이야기하면 바로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 이렇게 바뀐다."
―학생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하나.
"아이들한테는 돈은 많이 못 벌어도 좋으니 회사 생활 최소한 1년만
경험해보라고 한다. 실제로 돈을 벌기 위해 일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청소도 하고 산업 현장에서 풋내기로 겪은 어려움, 그때 경험하는 인간관계,
기술자와 초보자 간의 느낌, 이런 것이다. 내가 사출기 레버를 당기며
느꼈던 '이것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이것을 내가 이겨내야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줄 수 없다.
현장에 던져져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