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일은 오직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 때인 1964년 6·3사태 배후조종 혐의로 투옥됐다.
"1961년 4월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만 해도 이승만 독재를 몰아낸 4·19의 뒤끝이라 새로운
민족사의 진운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당연히 정치를 해서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는 꿈도 갖고 있었겠지.
그런데 한 달 만에 군사쿠데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순간 우리의
꿈과 희망도 사라졌다. 내가 할 일은 오직 군사독재와의 투쟁이요
이 땅에서 군사독재를 몰아내는 것이라 결심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6·3세대 아닌가?
"고려대에서는 최장집 서진영 박정훈 조홍규 이인식 등이 운동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상대 학생회장으로
참여했다 해서 한 두 달 고생했을 거다. 그때 감옥에서도 봤다.
그 뒤엔 특별하게 활동한 건 없다."
―6·3사태란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을 반대한 것이다.
"당시 우리가 진정 걱정한 것은 굴욕적인 외교형식 못지않게 그로
인한 영구분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끝난 지 10년 남짓밖에
안 지났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만 독자적으로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할 경우 분단이
고착화될 것으로 보았다. 실은 그 점이 더 큰 관심사였다.
그 회담은 분명 굴욕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불가피한 면도 있었다.
산업화에 긍정적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고."
―1971년부터 본격 재야(在野)운동에 뛰어든다.
“박정희는 1969년 10월 3선개헌으로 다시 한 번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심부름을 하며 1971년 4월 김재준 목사, 이병린 변호사,
함석헌 선생, 천관우 선생 등이 이끄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것이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의 첫 출범이다.”
―이듬해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의
강도는 더 심해졌다.
“교회와 대학가를 중심으로 저항의 움직임이 조직화되고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1974년 1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긴조(긴급조치)시대’다. 그중에서도 가장
살벌했던 것이 1974년 4월3일 발표된 긴급조치4호였다.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1204명이 검거돼 그중 180명이 4호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더욱 통탄스러운 일은 인혁당(인민혁명당)이라는 가공의 용공
단체를 고문으로 조작하여 이 단체가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했다고
덮어씌운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 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인혁당 사건으로는 이수병·
서도원·도예종 등 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민청학련 관련자 중 여정남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목숨을 구했고 인혁당 관련자 7명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난 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쉽지 않았겠다.
“일단 용공(容共)으로 몰리면 주변으로부터 처참하게 외면당한다.
그들을 돕거나 가까이하다가는 함께 용공으로 몰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민청학련 구속자 가족들도 ‘인혁당 문제를 거론하면 민청학련
사건의 해결이 복잡해진다’며 인혁당 사건 가족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최대한
자료를 수집해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적어도 박근혜씨는 지금처럼 아버지의 그림자를 기반으로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아버지가 한국 역사와 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특히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이미 법원에서도 그것이 조작된 사건임을
분명히 하지 않았나?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화해는 그런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이 깊겠다.
“원망은 없다.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없애고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대로 ‘정의가 없는
나라는 강도 집단과 뭐가 다른가’라는 물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상 사건도 폭로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이 교도소
용지에 갈겨 쓴 편지의 복사본을 보여주며) 이게 당시 이부영이
나한테 보내온 박종철 고문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용이다.
이걸 내가 받아서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했고 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 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진실이 알려진 것이다. 당시 보안계장이던 안유라는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민주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숨어서
기여한 인물이 너무나도 많다. 민주화를 민주화운동가들만의
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민주화 보상금도 신청하지 않았다.
“보상받자고 운동한 것 아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이해찬이 총리
된 것이 최고의 보상 아닌가? 민주진영의 부끄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