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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불사조'처럼 살아난 석해균 선장

by joolychoi 2011. 4. 1.

 

 


"이따위 해적들에게 당하다니…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새벽 3시가 되도록 조용하자 "내일이면 소말리아로 들어간다"… 해적들이 웃고 떠들어

최보식 선임기자 congchi@chosun.com

입력 : 2011.03.27 23:45 / 수정 : 2011.03.28 09:29

 

"해적 얘긴 많이 들었지만 실제 닥치니까 기분이 이상하데요. 그다음부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거죠. 나는 한번 하면 끝장을 봅니다. 가뜩이나 이런 해적들한테 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 안 했어요."

침대의 이름표에는 '석해*'로 되어 있지만, 석해균(58) 선장임은 다 안다.
아주대병원
 병실 벽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한 기념사진과 삼호주얼리호 깃발이 붙어 있다.
석해균 선장은“나는‘필드’스타일이라 누워 있어도 가만있질 못한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그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총탄 여섯 발을 맞고 사경(死境)을 헤매 우리를 애태운 게 언제였느냐 싶었다. 해풍에 그을린 '마도로스'의 얼굴빛은 그대로였고,
이 와중에 머리도 염색했다.
"나는 '필드(현장)' 스타일인데 이렇게 누워 있으니 답답하죠. 여기서도 가만있지 못합니다. 침대를 올리고 내리면서 계속 운동하고 있어요. 오른쪽 다리에 박아놓은 핀을 수술도 하지 않고 제거했어요. 당초 수술을 두 번 더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왼쪽 다리도 그렇게 할 겁니다. 다만 왼손이 문제인데, 이 손이 완전히 절단된 걸 저도 알고 있었지요.
당시 덜렁덜렁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총 맞고도 의식이 쭉 있었으니까요. 의식을 잃으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했지요. 최영함(艦)으로 옮겨져서도 '손이 부러졌다, 빨리 부목을 대달라'고 했습니다. 오만의 살랄라 병원에 후송돼 '손이 끊어졌다'고 말한 뒤에야 의식을 놓았습니다.
그 뒤 치료 과정은 전혀 모르죠."

그의 왼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고, 하반신은 이불에 덮여 있었다. 병원측에 따르면 그는 앞으로 두 달쯤 더 입원해야 하고 재활치료도 받을 것이다.
병원비는 해운사 보험으로 처리된다.

―처음 의식은 언제 돌아왔습니까?

"설날(2월 3일)에 내가 의식이 돌아왔다고들 보도됐다는데, 나는 전혀 모르겠어요. 내가 느낀 것은 2월 20일쯤인가, 집사람 얼굴이 보이더라고요. 병원이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깨어났어도 한동안 오락가락했어요. 취재진과 첫 인터뷰(2월 28일)한 것도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때도 온전하지 않았어요. 3월 2일 여기 병실로 옮겨온 뒤에도
'토끼가 보인다' '꼬마를 데려오너라' 등 헛소리를 했대요.
대통령이 오신 3월 6일부터 제정신이 완전히 돌아왔어요."

―당시 취재진과 만났을 때 '부산 사람이니까 낙지와 생선회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낙지를 보내주시곤 했는데, 병원식을 할 때여서 못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식(私食)을 합니다. 처음 김치를 먹을 때 속이 쓰렸어요. 간호사가 '먹지 마라' 말렸지만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하며 또 먹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생일 때는 낙지와 생선회도 맛봤습니다."

삼호주얼리호는 원래 그가 몰던 상선(商船)이 아니었다. 다른 선사(船社)의 배를 타고 목포에 들어와 있던 그에게 '
인도로 가서 삼호주얼리호에 승선할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이란으로 가서 화학물질을 실어 스리랑카까지 오는 임무였다.
이 배의 선원들과도 처음 같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선장이었다. 말썽을 피우던 선원 세 명을 곧바로 하선조치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과거 선장과는 다르다. 너희들이 배에서 알고 있는 것을 나는 다 안다. 너희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라. 배 위에서는 규율이 중요하다."

그렇게 항해를 시작해 20일쯤 됐을 때 해적을 만난 것이다.
소말리아 근방 '아덴만' 해상이었다. 해적들은 20노트(1노트는 1시간에 1852m를 달리는 속력)의 초고속정을 타고
접근했다. 삼호주얼리호에 철제 사다리를 걸쳐 재빨리 올라탔다.

선원들은 비상통신기와 물, 음식 등을 챙겨 '피난실'로 대피했다. 회사 등으로 긴급구조 요청을 했다. 해적들은 피난실 천장의 해치(출입구멍)를 망치로 부수고 들이닥쳤다.
압송된 소말리아 해적. /김용우 기자
―협상을 해서 돈 주고 풀려날 생각은 안 했나요? 그런 선례가 있는데.

"통상 피랍된 선장은 해적 두목과 친해집니다. 그러면 아무 해코지가 없어요. 회사와 협상이 타결되길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난 호락호락하게 보이는 건 싫어하죠.
선원들 중에는 '선장님 그냥 조용하게 갑시다'고 했지만, '나는 못 한다' 그랬어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든 거죠."

―무슨 마음으로 '나는 못 한다' 그랬습니까?

"해적들의 표적은 딱 한국 상선이더라고요. 그게 자존심이 상했어요. 제 성질이 별나서 그런지, '내가 이런 얘들한테 당해야 하나' '이따위 얘들의 밥이 되다니' 하는 마음이
생겨요. 처음부터 게네들과 타협한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어요."

―해적들도 선장님의 이런 의도를 알고 있었나요?

"피랍되고 사흘간은 괜찮았습니다. 설마 내가 그렇게 할 줄 몰랐지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해적들이 낌새챘어요. 정상 운항이면 피랍 지점에서 사나흘이면 소말리아 영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배의 속도는 느리고 항로는 도는 것 같고,
뒤에서는 우리 최영함(艦)이 계속 따라오고…."

―당초 피랍 나흘째 날 '1차 진입작전'을 시도하려고 했는데, 그때 해적이 눈치챘습니까?

"작전에 대해 눈치를 못 챘죠. 실제 작전도 개시되지 않았고. 최영함이 단정(短艇ㆍ작은 배)을 내렸고, 그 단정에서 '뱃머리를 돌려라'며 해상으로 몇 발 쏘고 돌아갔습니다.
겁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고, 해적들도 '곧 물러갈 것'으로 봤죠."

―우리 최영함과 어떤 교신을 했습니까?

"처음에는 해적들이 방심했습니다. 하루 만에 최영함과 교신이 됐을 때 '현재 상황을 알려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미속(微速)으로 운항 중이고, 해적은 몇 명이고, 무기 종류가 어떻고, 당직을 어떻게 서고, 배의 어느 쪽으로 진입하면
좋다는 정보를 보냈어요."

―진압 작전을 요청한 것입니까?

"진압을 해달라고는 안 했지만, 작전을 하면 이렇게 하라는 정보를 준 거죠."

―피랍된 뒤 우리 해군이 따라올 수 있도록 배를 세우기도 했다면서요?

"그건 아니고. 맨 처음 해적들이 올라와서 배 엔진을 껐어요. 내가 '너희들이 갑자기 정지시켜 엔진에 문제가 생겼다'고 속였어요. 기관장에게는 '미속(微速)으로 가라. 만약 속도를 내라고 하면 엔진의 최고 위험 회전수까지 올려라'고 지시했어요. 최고 위험 회전수에는 배가 흔들립니다. 해적들이 겁이 나 낮추라고 하면 다시 미속으로 하라고 했죠.
 엔진 상태가 안 좋아 속도를 더 이상 못 올린다고 한 거죠."

―얼마의 속력으로 운항한 겁니까?

"전속력이 14노트인데, 5~6노트로 운항한 거죠. 마지막으로 최영함과 교신이 됐을 때 '최대한 시간을 끌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지그재그로 몰았다는 말도 있더군요.

"배에는 항상 북위 90도를 가리키는 '방향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조 방향계는 손으로 조정할 수도 있어요. 배의 운항 각도를 조절한 겁니다. 너무 많은 차이가 나면
표시 나니까 약간 돌도록 해놓았아요. 또 조타기를 수동으로 조작하기도 했어요."

―이게 발각되면 본인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들었습니까?

"해적들이 쉽게 나를 죽이지는 못할 거라고 판단했어요. 공해상에서 총성이 들리면 뒤쫓아오는 우리 해군 함정이 공격을 개시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소말리아에 도착하면 나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래 내가 죽나 너희들이 죽나 어디 보자' 했지요. 나중에는
내게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쓰게 했어요. 변소 갈 때도 따라왔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적에 대항했습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쪽지를 적었어요. 이를 기관장에게 전하라고 조리장에게
건네줬습니다."

―기름에 물을 섞으라고도 지시했다면서요?

"물을 섞어 배를 멈추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실제 이행됐는지는 모르겠어요.
배가 선 적은 없었으니까요."

―지시가 잘 안 먹혀들었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선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어요. 내가 몰래 지시해놓은 게 잘 안 먹혀들고, 지시한 것과 다르게 이행해요. 해적들이 내게는 안 먹히니까,
선원들에게 총을 들이대 겁을 준 거죠. 조금 (내분이) 있었죠."

―피랍된 뒤 '식량이 다 떨어졌다'며 일부러 해적을 굶겨 체력을 떨어뜨렸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그건 아니고. 당초 부식은 거의 다 떨어져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구입해야 할 형편이었어요. 쌀만 좀 있었어요. 해적들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니까,
'하루 한 끼만 먹어라'며 게네들도 우리도 한 끼를 먹었어요."

―우리 선원들은 곧 진압작전이 있을 것이라고 낌새를 챘습니까?

"전혀 몰랐을 겁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은 1월 21일 새벽 4시 58분에 개시됐지요.
그 직전에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최영함은 1마일쯤 뒤에서 계속 따라왔습니다. 해적들은 당직 교대를 새벽 3시에 해요. 철두철미하게 합니다. 그날 새벽 3시가 되도록 조용하니까, 해적들이 '성공했다'며 웃고 떠들었어요. 다음 날 소말리아 영해 안으로 들어간다고 했어요. 기분이 착잡하데요. 그리고 얼마 뒤 총성이 울렸어요. 그 순간 해적들이 인간 방패로 이용하려고 '캡틴' 하며 찾았어요. 나는 매트리스를 뒤집어쓰고 선교
(船橋ㆍ배 갑판 위에 있는 선장의 지휘장소) 바깥으로 뛰쳐나갔죠."

―총은 언제 누구에게 맞은 겁니까?

"어떻게 맞았는지, 몇 발 맞았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총 맞은 느낌만 있더라고요. 매트리스를 뒤집어써 상체에는 총을 안 맞았어요. 임기응변이었죠. 그래서 살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항해하면서 이와 비슷한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 정도는 아니고. 인도네시아 근해를 운항 중 선장실에서 자고 있는데, 시커먼 놈이 내 목에 정글칼을 들이댔어요. 작은 배를 타고 접근해 올라오는 선상 도둑이었지요. 금고를 열라고 했어요. 이런 도둑에 대비해 큰돈은 금고 안에 넣어두지 않아요. 금고 안에는 1달러짜리 60~70장 넣은 봉투를 둡니다. 그 봉투를 내주니, 이런 좀도둑이 뭘 압니까."

―한번 항해를 나가면 어느 정도 걸립니까?

"길면 한 달쯤, 중간에 주유를 해야 하니까 잠깐 상륙해 회포를 풉니다. 같은 배에 37개월 승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회사에서 배려해줘 아내가 여섯달간 같이 동승했어요. 선상 생활은 단조로워요. 그걸 극복 못하면 배를 못 탑니다."

그는 가난 때문에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해군 부사관으로 제대를 한 뒤 1979년부터 배를 탔다. 해기사(海技士) 시험을 쳐 3등·2등·1등 항해사가 됐다. 선장이 된 것은 2000년이었다.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빨리 선장이 됐다고 한다.

"내 부모는 그렇게 살았지만 '나는 그렇게 못 산다. 집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못 배웠으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배를 탄 뒤로 집보다는 바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어요. 자식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자식들도 내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는지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