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재(望德齋)
고성군 마암면 도전리 용전마을에 있다.
충순위공 최윤재(崔潤才)의 둘째 아들 최협공(崔浹公)의 후손들이
의논하여 문중의 성력(誠力)으로 재실을 건립하고 매년 시향재계
(時享齎戒)와 문중 행사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 경내에는 충순위공(崔潤才)의 자 최협공(崔浹公)을 비롯한
5대의 제단비가 있다.(족보 최정호)
ㅇ 매국당(梅菊堂)
고성군 상리면 척정(固城郡上里面滌亭)에 있다.
처사공(處士公) 최규(崔珪)의 학문을 닦고 공부하던 집이다.
일암(逸庵) 강덕부(姜德溥)가 기문(記文)을 지었다.(고성지)
(주)최규(崔珪 18世) : 통덕랑공 최흥호의 후이고
찰방공 최홍(崔洪)의 현손
ㅇ매산재(梅山齋)
고성군 구만면 주천(固城郡九萬面酒泉)에 있다.
임진왜란 후에 마을의 서당으로 쓸쓸하게 변한 것을 숙종(肅宗) 9년
계해(癸亥:1683)에 양진재공(養眞齎公) 최유구(崔由久) 일문인
형제들이 일어나 2동 8칸(二棟 八間)을 세웠다
.지주는 김준익(金準翼)이고 대목수(大木手)는 허재(許材)이다.
땅을 고르고 관급미(官給米) 25두와 3면(三面)에서 온 인부들의 도움으로
낙성 되었다. 뜻 있는 여러 서생을 뽑아 이곳에서 거처하면서 겨울과
봄철에는 강학(講學)을 하고 여름과 가을철에는 과업(課業)인 공부를 했다.
그러므로 직하지풍(稷下之風 : 齊나라 宣王이 학자를 장 대우하였으므로
한 때 많은 학자가 이 곳 稷下에 모여 들었다는 고사) 같이 되었다.
군수인 이필무(李必茂)가 잡역을 하는 부역을 금하게 하여 처음 세운
취지가 이루어져서 우리 현에 이것이 서당(書堂)의 시초이다.(세헌록)
(주) 최유구(崔由久 15世) : 찰방공 최진호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