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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4. 제각(祭閣)-2) 묘각(墓閣)-봉산재-봉양재-일부재-화강재

by joolychoi 2010. 12. 18.

 

세덕총람 (世德叢覽) 


봉산재(鳳山齋)  
4. 제각(祭閣)
1) 묘각(墓閣)
ㅇ 봉산재(鳳山齋)
진주시 금곡면 죽곡리에 있는데 대지807평방미터 건물 132평방미터인 시멘트와
목조 혼합 기와집이다. 1983년 11월 시조 문성공 12세손이고 입죽곡조(入竹谷祖)인 진사공 최세강(崔世康) 이하 선조 시향을 봉행할 재실 건축을 결의하고 공의
12손 경락(敬洛) 책임으로 13세손 진권(震權), 영림(英林), 윤성(允成) 제씨가
주동하여 1987년 11월에 낙성하고 재호(齋號)를  봉산재(鳳山齋)라 하였다. 
이 후로 그 동안 350여 년을 묘전에서 합동시제 해 오다가 1944년 갑신 10월에
제단비를 세워 이곳으로 옮겨 제향하였던 시제를 다시  봉산재(鳳山齋)로 옮겨
청사(廳祀)로 봉행하고 있다.이 경내에는 진사공 최세강(崔世康) 의 송덕비가
있었다.공은 1592년 임진와란으로 팔도강산이 전화에 휩싸였을 때 부명(父命:
漢明)에 의하여 고성 영오(永吾)에서 이곳 죽곡(竹谷:대실)으로 피난하였다.
 

당시 이곳은 맹수와 포화(砲火)기 인명을 위협하였던 무주공산에 무심도인]

(無心道人)으로 6년을 인고(忍苦)하며 부명을 따른 효자요 현인(賢人)이

었다. 공이 입 죽곡(入竹谷)한 350여 년 전 무주공산이요 허허 벌판이

었던 이곳을 개척하여 사람이 살수있는 근거를 마련한 그 큰 업적과

후손들이 오늘을 누리게 해주신 음덕을 기리기 위하여 재일본 후손인

봉림(鳳林)의 성력으로 2005년 을유 10월에 송덕비를 제막하였으니

진사공 후손들의 길이 남을 장쾌한 대사이다. 이 송덕비 건립에 공의

13세손 명림(明林)이 다음과 같이 찬(撰)하고 있다.

 

“온곡 산중 대 명당에 먼 옛날 조상의 유택이 이루어졌으니 사시로 봄

기운 감돌고 상서로운 구름이 이는구나 ! 소나무.대나무 향기 가득한

봉산재에는 산새와 범나비가 분분히 날아 한가롭도다 !”

몇 백년전 조상께서 자리잡은 이 곳.괴로움을 이겨내고 지금은 평화롭구나 !

조상의 음덕과 자손들의 정성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칡덩굴처럼 어우러져

만대의 영화를 영화를 누릴 지어다.”

(溫古山中成古墳 四時春風彩白雲 松竹香萬鳳山齋 山鳥黃엽遊紛紛

累百年前創一家 宿歲忍苦今太平 上陰下誠劫不斷 祖遜相藤千秋榮

진사공파개요)

 

전주최공 세강 송덕비(全州崔公世康頌德碑)

ㅇ 봉양재(鳳陽齎)

봉양재(鳳陽齋)

고성군 회화면 당황리(固城郡會華面堂項里)에 있다.

소호공(蘇湖公) 최균(崔均)의 묘사를 준비하고 재숙하는 곳이다.(향교지)

(주) 최균(崔均 12世) : 우윤공 최담(崔潭)의 손

 ㅇ 일부재(日浮齋)

일부재(日浮齋)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최씨의 세장(世庄)에 사헌부 감찰이고 공조참의에

증직된 최공 호(崔公滬)의 후손들이 묘각을 지은 것이다.

일찍이 병자년 10월에 여러 종족들이 상의하여 공의 묘소 인근의

거대동(巨岱洞)산골짜기 일부곡(日浮谷)에 4칸 5영(五楹)의 재실을

지어 종족이 모여 재계(齎戒)하여 심신을 깨끗이하는 곳으로 삼았다.

주자(朱子)가 정사(精舍)를 한천(寒泉)에 짓고 그 지명으로 인하여

편액하였으니, 최씨가 일부곡(日浮谷)에 재실을 지어 지명으로 인하여

일부(日浮)로 명명한다(전주인 李丙烈지음)하고 1985년 을축

양복절(陽復節)에 현판을 걸었다. 공 무과 장원으로 홍덕현감이

되었으나 광해의 혼조에 관직을 버리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최규선)

 ㅇ 화강재(花岡齋)

화강재(花岡齋)

고성군 영오면 옵실(固城郡永吾面吾邑谷)에 있다.

정재공(靜齋公) 최득경(崔得涇)의 단제(壇祭)를 모시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하고 재숙(齎宿)하는 곳이다.

2007년 종중회의에서 2008년부터 정재공(靜齎公)의

시제는 하동군 두양면 소재 내현재에서 거행하기로 합의 하였음.

환여승람. 고성지. 향교지)

(주) 최득경(崔得涇 6世) : 시조 최아(崔阿)의 5세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