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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고려 경상도 안렴사 전주최공용생지 유허-옥산제(玉山齋)

by joolychoi 2010. 12. 6.

 

세덕총람 (世德叢覽)


(高麗 慶尙道 按廉使 全州崔公龍生 之 遺墟)
2. 안렴사공 용생 2세(按廉使公龍生2世) 
[
 * 고려 경상도 안렴사 전주최공용생 지 유허
   (高麗 慶尙道 按廉使 全州崔公龍生 之 遺墟)
   
   이곳 풍정(豊井) 계간(磎澗)은 고려말에 경상도 안렴사 최용생공(崔龍生公)이
은서영침(隱栖永寢)한 세칭 장령(掌令) 유허이다. 공을 모시던  묘단(廟壇)은 계미년 3월에 고성 구만으로 면봉(緬奉)하였다. 이에 공의 수택(手澤)이 스민 구단구(舊丹邱)에 입석늑명(立石勒銘)하여제세기미덕(濟世其美德) 하노라.
 
                        무자년(서기2008년) 유하(유夏)
                                    전주최씨 안렴사공 종중
 
* 옥산제(玉山齋)
 

                                 옥 산 재( 玉 山齋)
]
   고성군 구만면 당산리(固城郡九萬面堂山里)에 있다.안렴사 공(按廉使公) 최용생(崔龍生)의 단제(壇祭)를 모시기 위하여 여러가지 준비를 하고 재숙(齋宿)하는 곳이다. 2005년 사천시 정동면 풍정동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세헌록)
 
 - 상량문(上樑文)-
    예기,제통편(禮記祭統編)에 이르기를「선조의 선행이 없는데도 그 자손이 있는것 처럼 꾸며서 말하는 것은 하늘을 속이는 것이요, 선조의 선행이 있음에도 그것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그 자손이 무식한 탓이며, 선조의 선행을 알면서도 그것을 보전하여 후세에 전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저버리는 불인(不仁)이라.」고 하여 이 세가지를  군자의 수치로 규정하고 있다.
 
    엎드려 살피건대 우리 전주최씨는 시조 문성공(文成公)께서 고려 충숙왕조에 문하시중을 지내시고 완산군(完山君)을 봉배하였으며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모두가 밀물(密勿)의 덕망을 갖추어 어진 소문이 그치지 아니하였다.장자(長子) 용생
(龍生)은 천성(天性)이 청렴강직(淸廉剛直)아였으며 일찍 문과에 등제하여 지평(持平)에 오르고 대간(臺諫)을 겸직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정왕(忠正王) 경닌(1350) 2월에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으며 당시의 나라 사정은 원나라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조정은 어향사(御香使)의 이름으로 원나라에서 파견된 환관(宦官)이 국정을 좌우하였고, 지방에도 군사 감독관이 배치되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으니 백성들의 생계는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이 때 공은 개경(지금의 개성)을 출발하여 문경, 상주를 거쳐 동경(지금의 경주)의 감영(監營:도청소재지)에 이르니 이곳에 파견된 원나라 환관이 공주(德寧嬉妃)의 총애를 믿고  갖은 횡포를 자행하며 백성을 괴롭히는데도 누구 하나 제지 할 엄두를 못내고 있으므로 공은 가차없이 이들을 봉고 파직하여 하옥하고 그 죄상을 적은 방을 방방곡곡에 붙여서 온 국민이 알게하니 동경 백성은 크게 감복하여 공의 덕정(德政)을 칭송하였다.이 사실을 어향사 주원지테무르(朱元之帖木兒)가 왕과 공주에게 참소(참소(讒訴)하여 경상도 안렴사를 김유겸으로 바꿔 버렸다.
라고 쓰여 있다
 
엎드려 생각컨데 사천시 정동면 풍정동 옥산골은 우리 전주최씨 종파조(宗派祖)
이신 안렴사공께서 고려 말의 기울어진 국정을 바로 세우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려다 간신배의 참소를 입고, 머너먼 사구 빈(泗水濱)으로 적출(謫出)되어
은일(隱逸)로서 여생을 마치신 곳으로 족보에는 묘(墓)기 이곳 간자지원(艮坐之原)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실전하여 알 수가 없다. 미루어 생각컨대, 공의 현손 현감공(子涇)이 조선 세종조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와서
진주 강주촌으로 이사를 하였는데 그 때 현감공(子涇)은 상자(水智)가 홍문관 웅
교로 출사를 하였기 때문에 장손()같이 살면서 사천 풍정동의 선대의 묘소에 조손이 함께 성묘를 다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장손 ()은 문과에 등제하여 군수로 승진하였는데 조부 현감공
(子涇)이 별세하니 사천 객방산에 장사를 지냈으며 조부 상을 면한 후에 자당(慈
堂)이신 함평 모씨(儉齋公水智配位)를 모시고 함안군 산인면 안인리(咸安郡山仁面
安仁里)로 이사를 하였다. 함안으로 옮긴  군수공(崼)아들은 무과에 등제하여 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으로 승진하고 매계공 조위(梅溪公曹偉)와 같이
점필재김종직(점畢齋金宗直)선생을 사사(師事)하였으며, 탁영공 김일손(濯
纓公金馹孫), 한훤당공 김굉필(寒暄堂公金宏弼). 일두공 정여창(一두公鄭汝昌) 등과 교유하며 학문 연구에도 매진하였다.
 

    그 후 김해부사로 부임하여 성내(城內)의 호계변(虎溪邊)에 연자루(燕子樓)를 세우니 좌상 어세겸(左相魚世謙)옹이 "함허정(涵虛亭)" 이라고 명명하여 제액(題額)하였으며 탁영공 김일손(濯纓公金馹孫)이 기문(記文)을 지어 걸고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강론하며 떠 풍류를 즐겼다. 얼마 후 호조참판이 된 매계공 조위(梅溪公曹偉)의 추천으로 병조참의겸 도정(兵曹參議

兼都正:正3品堂上)에 내정되었으나 예기치 못한 연산 조(燕山朝)의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점필재(金宗直)의 문도는 모조리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함안 본제(本第)에서는 점필재 선생의 문하에 입뭄 수학하였던 장자 담(潭)이 황급히 식솔을 이끌고 고성 구만으로 잠적 은둔(潛跡

隱遯)하여 난을 피한 후 이곳에 정착하였다.

  
 경남의 고성은 엣 부터 인재의 부고(府庫)로서 명경 거유(名卿巨儒)가 많이 배출되는 곳이며, 특히 이곳 구만은 아홉개의 준봉(峻峯)이 둘러/사인 넓은 구원(丘園)을 아홉 구비 계수(溪水)가 감싸 흐르니 가히 봉성(鳳城:서울)에 비길 승경지(勝景地)로서 고풍을 지켜 보전 할만한 명당으로 손곱히는 곳이다. 또한 사화(士禍)를 피하여  은든하였다는 뜻으로 스스로 둔암(遯庵)이라하고 이곳에 정착한 후 유행(儒行)으로 그 명성을 크게 떨친 둔암공(遯庵公)의 뒤를 이어 그 손자 소호공(蘇湖公均)과 소계공(蘇湖公堈) 형제분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포의(布衣)로서 창의기병(倡儀起兵)하여 적을 섬멸하고 대첩(大捷)을 거둔 전략상의 요지이기도 하며, 쌍충(雙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우리 가뭄 중흥(中興)의 땅이기도 하다.
 
   엎드려 살피건대, 우리 가문은 보적(譜籍)에 등재한 700여년 동안에 여러차례의 환란을 겪으면서 선대의 묘(墓)를 잃어버리는 불인(不仁)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지금으로 부터 약 80년 전인 갑자년(1924)에 종충의 뜻을 모아선조 안렴사공의 묘 단비를 사천 풍정동 어귀(於口)에 세우고자손들이 모여 건공제경(虔恭齊敬)할 재실을 복축(卜築)하여 지명을 따서 옥산재(玉山齋)라 제액(題額)하고 해마다 세천지의(歲薦之儀)를 받들게 되었다.그 뒤 정해년(1947)에는 도산서원 경내에 터를 마련하여 실전한 선세의 묘는  이곳에 함께 모아 설단하고 단향 비를 세워서 합제로서 세천의 예를  모셔 왔다.
 
사천 풍정동의 옥산재는 그 동안 세월이 변천하여 자성(子姓)이 번성하고 영허(靈墟)가 협소할 뿐 아니라 주변이 개발되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서 제단(祭壇) 본연의 품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므로, 여러 해를 두고 종론을 모아 협의한 끝에 우리 가문의 중흥지인 고성 구만의 당산에 대지를 마련하여 선조 안렴사공의 단비를 옮겨 모시고 또 도산서원 경내의 선세 단비도 선조의 단비 좌측에 옮겨서 소목(昭穆)을  바로 이어 받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후손이 함께 모여 강선수목(講先修睦)할 영대(靈臺)를 짓기로 하고 온 종중이 힘을 합하여 10년취재(十年聚材) 10년구사(十年構思)의 정성으로 힘을 쏟은 결과 드디어 계미(2003) 4월 12일에 옥산재 이축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꾸준히공역의 진전으로 오늘 연길(涓吉)을 택하여 이에 들보와 마룻대를 거는데 감히 읊고 노래하는 운율에 맞추어 서두에 적은 예기(禮記)의 글귀를 되새기며 삼가 그 뜻을 붙이노라.
 
  동으로뻗친 들보일세. 보금자리 옮겨서 이곳에 터 닦으니, 오랜 세월 계획한 문중의 역사이며, 합심하여 이룩하는 빈틈없는 공사로다.
  남/족으로 뻗친 들보일세. 봉우리 조아리며 구산이 호위하고, 동남쪽은 망망하게 바다로 트였으니,쇠(패철)를 빌릴 필요 없는 대 명당이 분명하도다.
  서에 뻗친 들보일세. 지리산 뻗은 정기 하늘에 닿아, 이곳으로 이어져서,지기가 서렸는 가, 선조께서 음덕 내려 후손들을 돌보시내.
  북에 뻗친 들보일세. 좋은 과업 물려받아 자손들이 즐기니, 북극성 에워싸고 뭇별이 회전하듯, 한결같은 마음으로 영원히 보전하리.
  위로 뻗친 들보일세. 묘단을 우러러 옛 일을 살피니,환관 비행 방에 붙여 규탄하신 충성심, 그 뜻을 이어 받아 치성드려 모시리라.
  아래로 뻗친 들보로다. 고상하게 꾸민 동산 운치 곁들고, 조화로운 그 기술에 모두 취해서, 공역 맡아 힘쓴 분들 이제야 치사하오.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上樑)을 한 뒤에는 오로지 사단(社壇)에 필분(苾芬)이 이어져서 훈호(焄蒿)가 창창하고 도포자락 가지런히 전성(展省) 길 줄을 이어 육아(육莪:선조를 바로 모시지 못한 슬픈 마음)의 여한(餘恨)을 돌이켜 되새기며 온고지신(溫故知新) 스승으로 솔선수범여서꺼져가는 유풍여교(遺風餘敎) 불을 지피고  떨어진 윤기(倫紀)를 바로 세워 나간다면 이에 따르지 않을 인심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어찌 우리 가문만의 긍싯(矜式)이 겠는가. 동방예의지국의 체모(體貌)를 다시 일깨우는 전고(典故)가 될 것으로 믿으며 힘을 합친 우리 종친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 영원무궁하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세갑신(歲甲申) 3 월 28 일
                                     23세손 낙관(洛罐)  근술(謹述)
       옥산재신축추진위원회  대표 위원장  락서(洛瑞) 감수(監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