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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1.선대- 2) 시조 문성공(始祖 文成公 )

by joolychoi 2010. 12. 4.

 

 

 

  

세덕총람 (世德叢覽) 


始祖 文成公 墓所 

 

Ⅰ. 세덕편(世德篇)

     1. 선대(先代)
     2) 시조 문성공(始祖 文成公 )
         휘(諱) 아(阿) 이고 자(字)는 형지(衡之)이니 고려 충숙왕(1313-1330)복위
(1332-1339) 때 분이시다.염정결백(廉正潔白)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시어
문과 급제하시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셨다. 찬성사(贊成事)로 계실 때
장시관(掌試官)으로 이암(李癌) 등 37명의 선량(善良)을 잘 뽑았다고 칭송이
높았다 한다. 조정에서는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리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하였다.
 
4남 2녀를 두시니 맏이 용생공(龍生)은 경상도 안렴상이고, 둘째 용각공(龍角)은
대호군이며,셋째 용갑공(龍甲)은 판사공이고, 넷째 용봉공(龍鳳)은 중랑장 이다.
여기에 문성공 묘에 대한 사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문성공의 묘는 전북 완주군 소야연 분토동 주덕산 유좌 묘향으로 있음이
단권보와 각 집안에 전해지는 기록들에 밝혀져 있다. 다시 말하면 공의 종손인
「 참의공(  ) 후손 집안의 보첩에는 참의공의 묘는 선영의 상절(上節)에 있으며
연촌공(德之)의 묘는  선영의 중절(中節)에 있고, 소윤공(得之)의 묘는
선영의 북쪽 산기슭에 있으며 갑룡(甲龍)의 무덤이 선영의 섬돌 계단
아래에 있다 」라 하였다.
   또 최학명(崔學明:중랑장공파)의 집안 계해년 족보에는 「 문성공의 묘는
연촌공의 묘 앞에 오래된 옛 무덤 뒤에 있는 예장방분(禮葬方墳)이다 」라
하였으며「 갑룡(甲龍)의 쌍분이 문성공 묘의 아래에 있다.」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럼에도실묘(實墓)논란으로 양론 합일 없이 묘사(墓祀)와 단사(壇祀)를
한 동안 봉행하고 있었음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 주덕재(周德齋)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全羅北道完州郡所陽面竹節里 粉土洞)

에 있다. 시조 문성공(文成公)의 묘사(墓祀)를 모시는 제반사를 행하며 재숙(齋宿)

하는 곳이다.(세헌록)



    주덕재(周德齋)

                                     전북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423



* 고려 문화시중 완산군 문성공 신도비명

   (高麗 門下侍中 完山君 文成公 神道碑銘)

 

   아아 !무릇 대인(大人)이란 이기(二氣)의 빼어남을 부여받아 모든 만물의 위에

뛰어나서, 살아서는 후손들에게 음덕을 드리워 향화(香火)가 백세도록 끊어지지 않게

하는사람이니, 상(商)나라의 아형(阿衡)과 같은 사람이 그러한 사람이다.

전주 최씨의 시조인 우리나라의 최 문성공(崔文成公)도 이른바 대인(大人)이시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아(阿)이고 자는 형지(衡之)이다. 고려조 충수광(忠肅

王)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니 맑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이 한 시대에

높이 알려졌다.아들 4형제를 두셨은니, 장남인 용생(龍生)은 문과에 급제하여

안렴사(按廉使), 둘째 용각(龍角)은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대호군(檢校大護軍),

셋째 용갑(龍甲)은 문과에 급제하여 판사(判事), 막내 용봉(龍鳳)은 중랑장

(中郞將)을 지냈다.자손들이 더웅 번창하여 조선조에 이르러  세상에 알려진

훌륭한 선비들이 연이어 나왔는데, 도덕과 학문이 올바른 행동으로 나라의 제사에

참여한 자가 16명이며,중효와 절조로 마을에서 정려문을 받은자가 수십명이다.

이 외에도 문장 덕업(德業)과 벼슬하고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이 이루다

헤아릴 수 없으니,만약 공이 인(仁)과 의(義0를 샇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 같은

독경(篤慶)이 능히 있을 수 있으리오 ?

 

   무릇 문회시중(門下侍中)은 높은 관직이고,문성(文成)은 아름다운 시호이니,

가만히 생각건대 아마도 공의 아름다운 업적은 마땅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인데

가문의 기록이 없어져 고증할 길이 없다. 고려사(高麗史0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다만

「 공이 찬성(贊成) 벼슬 때 과거 시험관이 되어 이암등 37명을 뽑으니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잘 골랐다.」고 칭찬하였다고 되어 있다.또 공의문장은

진한(秦漢) 이래의 고법(古法)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어찌 공의 모든 면면을

다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문헌에 기록이 제대로 갖추어 지지 않은

것이 어찌 태사시(太史氏)가 자신의 직분을 잃어버린 것에만 그 까닭이 있겠는가 ?

   대개 혁명 혼란기를 당하면 비록 훌륭한 문장이나 서적이라 하더라도

유실한 것이 많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는 어떠하겠는가 ?

 

   공의 묘는 전주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 주덕산((全羅北道完州郡所陽面竹節里 粉土洞

周德山) 유좌(酉坐)의 자리에 모셨는데 비석이 이미 무너져 버려서 지문(誌文)의

증거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정조(正祖) 정사년(丁巳年:1797, 정조21)에

선산 북쪽에 제단을 쌓아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 그 뒤 다시 단권보(單卷譜)와

11권보(十一卷譜) 및 집안에 전해오는 기승과 여러 기록들을 증거로 하여

철종 갑인년(甲寅年:1854. 철종 5)에 묘사를 지내고 비석을 세워 표하였다

.옛날 주제치사(朱制置使) 괴(壞)가 선영을 잘 받들지 못해 타인의 소유가

된 일이 있었는데, 회암선생(晦庵

先生)이 비로소 봉분울 만들고 비를 세운 뒤에 알려서 말 하기를 

" 구태여 그 꾸지람을 불사한다."라 하였다.대개 회암선생(晦庵先生)을 손자로

둔 그 조부도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자 못함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조상의 무덤이 드러나고 묻혀버리는 것에 어찌 정해진 수(數)가 있겠는가 ?

 

빛나도다. 최씨여, 훌륭한 가문이라,청하(淸河)를 넘어와, 완산을 관향으로 하였네.

면면히 이어온 그 줄기여, 우리나라에 번성하였네.

뛰어나신문성공(文成公)은 고려의명신이며, 큰 경륜과 공적이 어찌 말물(密勿)이

아니겠는가 ? 하늘이 도와주셔서 남은 복이 돈독하네.

그 복이 무엇인가 ? 바로 네 분의 아들이라네. 그 후손이 얼마인가 ? 

천(千)도 억(億)도 더 되도다.

    문무를 겸비하고 질박함과 학행이 있었네, 착하고 어진 이들 국왕을 도우시니,

만세를 이어가며 그 덕택을 드리웠네. 높고 높은 주덕산(周德山)은 수양산(首陽山)의

동쪽이라, 무덤이 여기 있은니, 서기가 서렸도다. 이 명을 돌에 새겨 무궁토록 밝히리라.

 

    자헌대부 형조판서(資憲大夫刑曹判書) 진성(眞城) 이효순 (李孝淳)이 삼가짓다.


시조 문성공 신도비 (始祖 文成公神道碑)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분토동산 198번지

 

아 아 ! 공이 타계하신지 이미 수백년인데 후손들이 더욱

성대해지고 시들지 않으니 후손들이 보답을 받아,

이미 제단의 제사를 모시다가 묘사를 지내고 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신령하신 선조의 영혼이 장차 오르내리시며 묵묵히 도와 주셔서

주덕산(周德山)과 함께 영원히 변치 않으리로다. 명을 짓는다


始祖 文成公 墓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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