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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2.파조안렴사공--2) 안렴사공 용생 2세(按廉使公龍生2世).-묘단비

by joolychoi 2010. 12. 5.

 

 

세덕총람 (世德叢覽)

 

2. 파조 안렴사공파  

    2. 안렴사공 용생 2세(按廉使公龍生2世)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에 오르고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원나라 환시(宦侍)들의 내정간섭의 부당함을 누차 직간(直諫)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사서 외직인 경상도 안렴사로 나왔으나 김유겸(金有謙)이 후임으로 교체되어

오자 사천(泗川)에 옮겨 살게되니 영남의 최씨가 뿌리내린 시초가되었다.

실묘(失墓)하여 옥산재(玉山齋)에서 단사를 모신다.

 

 * 안렴사공 묘단비(안렴사공墓壇碑)

 


   사수현(泗水縣) 동쪽 5리에 풍정동(豊井洞)이라는 마을이 있다.우리 가문의 기록을 살펴보면,고려 때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지냈으며 휘(諱)가 용생(龍生)인 우리 선조의 묘소가 이곳의 간좌(艮坐)에 있다고 되어있다. 대체로 니구산(尼邱山)이 서쪽으로 큰 줄기를 뻗어서 왼쪽으로 감싸 안은 듯 하고 오른쪽으로 빙 둘러 쳐졌고, 가운데에 하나의 산 기슭이 있어 그 아래에 우/둑 터전을 잡은 곳이 풍정동의 주봉(主峯)이다. 봉우리 오른쪽에 오래된 무덤 수십개가 바라보이는데, 그 제일 첫번째자리 곤향(坤向)에 있는 쌍분(雙墳)이 우리 가문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마 공의 무덤은 반드시 그 오른쪽으로 둘러처진 곳에 있을것이다라고 전해진다.푸른 계곡을 찾아 들어가니 깊고 그윽한데 동부(洞府)는 넓고 평평해져 있었다. 또 공의 유허가 있다고 생각되는 계곡을 손으로 가리키니 그곳의 전해지는 이름이 "장령(掌令)이며 공의 관함(官銜)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지금까지700여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우라 최씨는 전주의 오래된 문벌로 시조의 휘(諱)는 아(阿)인데 고려조 충숙왕(忠肅王) 때 벼슬을 하여 관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세대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게 되자 마침내 문성공(文成公)을 시조로 모쎴다.대개 구양수(毆陽修)가 말한 시대가 멀기 때문에 알 수가 없다. 문성공의 네 아들은 문장과 벼슬로 모두 조정의 고관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공은 장남으로 부친의 업을 이어 받아 또한 문과에 급제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검소함을 지켰으며 총명함이 남들보다 뛰어났고,시서(詩書)를 전수받아 익혔다.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면 「 충정(忠定) 2년 경인년(庚寅年)에지평(持平)인 최용생(崔龍生))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되었다. 용생은 원(元) 나라의 총애르르 믿고  우리나라 백성들을 괴롭히는 사신을 미워하며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어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는데,원나라 사신이던 주원지 테무르(朱元之 帖木兒)가 왕과 공주에게 용생을 참소하여 김유겸(金有謙)이 공의 관직을 대신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공은 사천(泗川)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은둔하며 종신도록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지금 영남에 살고있는 최씨는 모두 공의 후손들이다. 공의 생졸 년대와 배위의 가계에 대해서는 상고할수 없다. 아들은 판도정랑(版圖正郞)을 지낸  전우(田雨)이고, 딸은  보성군(寶城君)인  오몽을(吳蒙乙)에게 시집갔다..손자 택(澤)은  위전(衛典)을 지냈다.

 

   증손자 사필(斯泌), 사지(斯沚), 사강(斯江)인데, 사필은 조선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고, 사지는 후사가 없으며, 사강은 시정(寺正)을 지냈다.사필의 아들은 자경(子涇), 득경(得涇) 인데,자경은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고 판사(判事)로 추증되었다. 득경은 군수(郡守)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사강의 아들 종복(宗復)은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증손이하 대대로 아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수지(水智)는 응교(應敎)를 지냈고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으며, 응룡(應龍)은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기필)琦弼)은 판관(判官)을 지냈고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었으며, 현(晛)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시호가 정간(定簡)이다. 균(均)은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가 의민(義敏)이고, 강(堈)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훈(塤)은 판관(判官)을 지냈고, 탁(濯)은 익찬(翊贊)을 지냈으며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산휘(山輝)는 완해군ㄴ(完海君)에 봉해졌으며 시호가 효헌(孝憲)이다. 수강(秀岡)은 사직(司直)을 지냈고 광벽(光璧)은 참판(參判)을 지냈는데 ㅣ분들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신 분들로 학문과 훌륭한 행동으로 끊임없이 역사에 기록되었다.크고 작은 과거에 장원을 하신 분이 여러분이며, 서원에 배향되신 분이 60여분이니 뛰어난  분들이 대대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공이 훌륭한 덕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 오래도록 시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가 살펴보건데 인재선생(인齋先生)  현(晛) 시에 "우리 선조는  사천에 사셨는데, 엤 사당의 분유(扮楡)를  몇 년이나 보았던가." 라 하였다. 내가 이 시를 읽을 때 마다 슬프게 방황하였고 그 때마다 공의 무덤이 황량히 사라져서 옛 일을 상고할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장령(掌令)의 유허에는 지금도 옛날의 미담이전해지고 있으며 풍정동의 계곡과 무덤이 서로 이어져 있어 이곳이 공의 묘소라고 말을 해도 감히 그렇지 않다고 말 할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퀭한 눈을 하고서 증거 할만 한 것이 없다고 끝내 제사를 지낼수 없게 되면 공의 유허를 황폐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니 이마에 땀이 흐르듯 두려운 일일 뿐 아니라, 1년에 한번 지내는 제사에 후손의 정성을 올리는 것 또한 합당한 예를 갖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단을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또 몇 년이 흘러버린 것은 억지로 끼어 맞추어 제단을 만들면 조상에 감사하는 제사가 잘못될까 걱정했기 때문이 었다.  이에 신유년(辛酉年 1921) 겨울, 종실의 논의가 비로소 갖추어져서 후손 정규(正奎) 등 여러 사람이 공인에게 물어 비석을 세우며  3년 뒤인 갑자년 10월에 준공하니 해마다 올리는 제사의 의식이 완성되게 되었다.

 

   또 글을 지어 조상의 덕을 기록하자고  의논했다. 아 아 !! 우리 선조는 맑은 명성과 올바른 도로서 위태로운 조정에  간언을 올려 그 훌륭함이 역사에 빛나고 있은니 마땅히 그 가통이 후세에 길이 이어질 지다. 모든 종실이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마침내 이루어낸 것이며, 우리 선조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더욱 알려짐이 존재하는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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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손 도섭(道燮) 삼가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