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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世德叢覽(全州崔氏 按廉使公 宗會)

옥산재 사적비(玉山齋史蹟碑)

by joolychoi 2010. 12. 7.

 

세덕총람 (世德叢覽)

옥산재 사적비(玉山齋史蹟碑
 
2.안렴사공 용생 2세(按廉使公龍生2世)

*옥산재 사적비(玉山齋史蹟碑)
이곳은 우리 전주최씨 시조 문성공 (阿)의 장자이신 고려 경상도 안렴사부군
(龍生)을 모신 됴단이다. 상고하건대 부군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대간(臺諫)에 봉직 하실 때 우리 조정에 배속된 환관(宦官)의 내정간섭과 횡포가
심하여 완권이 무력해지자 그 폐해와 부당성을 누치 왕에게 직간하였다가 오히려
그들의 질해(嫉害)를 입고 충정왕 2년(서기1350년)에 외직인 경상도 안렴사가
되어 부임하셨는데, 당시 동경(慶州)에 파견된 원나라의 군사 감독관이 가렴주구
(苛斂誅求)만 일삼는 등 그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이를 제어할
수 없음을 부군께서는 그 청렴 간직한 성품으로 이들을 모조리 봉고파직
(封庫罷職) 시키고 그 죄상을 낱낱이 방을 붙여서 백성들에게 알렸다.
 
이 일로 인해 참소 당하여 삭탈관직(削奪官職)된 후 사천 풍정동에 유배되셨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이연종(李衍宗), 초영(崔瑩)장군 등과 의기투합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고려사는 이 만고의 충절을 찬연한 역사의 한 장으로 특필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으니 후손들에겐 지상(至上)의 비분인 동시에 영광이요 긍지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이 부군께서 사천에 유배되어 살게 됨으로써 영남의 전주최씨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조선조에 이르러 부군의 현손 현감공(子涇)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가서 진주로 이사하였고,그 장손 군수공(以湜)은 진주에서 함안으로 옮겼으며 다시 그 장손 우윤공(潭)은 함안에서 구만으로 입고성하니 이후로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우리나라 굴지의 문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번의 병화를 겪으면서 부군을 위시하여 누대에 걸친 선조의 묘를 실전한 불경을 저지르게 되었는데 서기 1924 년 갑자에 비로소 사천 풍정동에 터를잡아 부군의 묘 단비를 세우고 재실을 지어 옥산재(玉山齋)라 이름하고 해마다 제사를 모셔왔다. 그러던 중 지난 서기2000년겨인의 종회에서 무인보사(戊寅譜事)로 마련된 기금에 자손들의 성금을 보태어 부군의 위업에 걸맞은 옥산재를  이전 신축하기로 종론을 모아 옥사내신축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부지를 물색하던 중 우윤공께서 조기(肇基)하신 세장(世庄)이자 자손들의
집성촌인이곳으로 대역사를 이룩하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재실과 함께 단비도 새로 세울 계획이였으나 조상을 위한 선대의 정성을
보전해야 한다는 종의에 따라 본체(本體)인 비신(碑身)은 그대로 옮겨 모시고 받침돌만 바꿔 세웠기에 외관상 모습은 흡족하지 못하나 조상의 얼이 깃든 유서 깊은 명당을 복정(卜定)하여 이룩한 신성한 묘단이고 재실이라 하겠다. 부군 외의 실묘한 8위의 선대에 대하여는 서기 1947년 정해 도산서원 경내에 단비를 세우고 제사를 모셔왔는데 이번에 옥산재로 옮겨 부군의슬하에 두시게 하여 소목을 밝혔으니 이 또한 뜻 깊은 일이라 하겠다. 다만 처음에 계획했던 동서재(東西齋) 건립을 함께 이루지 못하고 후대의 과제로 넘기게 된 아쉬움이 크다.우리가 갈망 해 오던
부군의 영혼이 임하실 재당(齋堂)이 그 크신 위업과 음덕에 비하면 미흡하여 부끄럽지만 그래도 우리 후손들은 옷 깃을 여미고 부군의 기백과 영기(靈氣)와 의분
(義憤)을  오늘에 되새겨 숭조 목종 효우의 정신이 영원도록
이곳에 유연(油然)하기를 바라노라.
 
서기 2006 년   병술   3월
옥산재신축추진위원장    락서(洛瑞)   근지(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