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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이야기] 마산 '키다리 아저씨'의 특별한 생일손님

by joolychoi 2009. 11. 6.

 

 

[사람과 이야기] 마산 '키다리 아저씨'의 특별한 생일손님

 

지난달 31일 생일을 맞은 김광남씨(오른쪽)가 경남 마산시 완월동 자택에서 자신이 1999년부터 5년간 후원해줬던 김모씨(22)를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암투병 김광남씨,
교직원 시절 몰래 도움 준 아이들과의 만남
어려운 학생 5명 통장에 월 10만원씩 익명의 입금
식도암 말기 힘든 투병중 "그 아이들이 보고 싶어…"

야윈 노인이 아파트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후 내내 누군가를 기다렸다. 바깥에 인기척이 날 때마다 엉거주춤 현관 밖을 내다봤다.

"땡!"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더벅머리에 갈색 뿔테안경을 쓴 김모(22·
부산대 간호학과 4년)군이 문을 열고 나온 김광남(金光男·65)씨를 향해 쑥스러운 듯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광남 아부님 댁 맞습니까?"
"어여 온나!"

지난달 31일 오후 6시, 경남 마산시 완월동의 한 아파트(109㎡·33평). 집주인 김씨가 쇠고깃국, 삼겹살, 조기, 두부조림, 두릅무침, 도토리묵이 푸짐하게 올라온 밥상에 청년 김씨를 앉혔다. 손도 잡아보고 어깨도 쓸어보며 흐뭇해했다. "번듯하게 잘 컸네."

이날은 김씨의 만 65번째 생일이었다. 부인 이희순(63)씨가 김 솟는 흰 밥을 떠왔다. 김씨는 자기 밥을 듬뿍 떠서 김군의 밥그릇에 얹었다. "마이 묵어라."

정작 김씨 자신은 물 말은 밥에 간장 한 방울 떨어뜨려 반 공기를 간신히 비웠다. 한 수저 삼킬 때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김군이 걱정스레 쳐다보자 그는 희미하게 웃었다. "괘안타. 마이 묵어라."

김씨는 식도암 말기다. 지난해 7월 물만 마셔도 목이 따끔거려 병원을 찾았다가 암 진단을 받았다.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에 이어 35번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김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열 중 일곱은 치료 뒤 2년 이내에 재발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병원에서 '길면 3년 정도 살 수 있다'고 했어예. 그전에 간이나 폐, 뼈로 암이 번질 수도 있고…. 죽기 전에 아이들 얼굴 한 번 꼭 보고 싶어서 초대한 겁니더."

김씨가 보고 싶어한 아이들은 지금은 청년이 된 마산서중학교 졸업생 5명이다. 김씨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이 학교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200만원 못 미치는 한 달 봉급을 쪼개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학생들에게 매달 10만원씩을 학비로 보태줬다. 2001년 12월 만 57세로 정년퇴직한 뒤에도 한 달에 100만원 남짓 나오는 연금을 쪼개 학비를 보냈다. 그는 "처음부터 안 도왔으면 몰라도 한번 시작했으면 졸업장 받을 때까지는 계속 돕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한 선행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시작된 일"이라고 했다.

1999년 3월, 한 학생이 점심을 먹지 않고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봄볕을 쬐고 있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째 되던 날 김씨가 다가가서 "밥 안 묵나?" 하고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누나와 단둘이 살던 2학년 학생이었어요. '점심시간이 싫다' 카대예."

김씨는 학교 서류철에서 그 학생의 인적사항을 챙겨 통장을 만들어줬다. "내 이름은 절대 말하지 말고 그냥 '어떤 아저씨가 주고 갔다'고만 하라"며 양호교사를 통해 통장과 도장을 전했다. 김씨는 같은 방법으로 4명의 아이들에게도 돈을 보냈다. 부모가 가출해 홀로 남겨진 아이, 신문배달을 하며 동생을 돌보는 아이 등이었다. 자기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는 "많이도 아니고 조금 도와주는 건데, 좋은 일 한다고 유세 떨기 싫었다"고 했다. 당시 큰딸(39)은 고등학교 영어교사였다. 장남(37)과 차남(34)은 대학생이었다. 그는 "내 새끼들이 한창 자랄 때 풍족하게 키우지 못한 게 늘 안타까웠다"며 "그래서 그런지 부모 없이 점심 굶고 다니는 애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그 뒤로 아이들을 잊고 지냈는데, 암 투병을 하면서 불쑥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뇌졸중이 온 뒤 그런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그는 "암이 재발하기 전에, 뇌졸중이 다시 와서 의식을 잃고 드러눕기 전에 그 아이들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동사무소와 학교를 통해 3명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한참 망설이다 지난달 조심스레 전화를 걸었다. 암 말기라는 얘기는 안 하고 그저 "지금 좀 아픈데, 곧 생일이 되니 밥이라도 한번 먹으러 오라"고 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다들 굵직하고 건강했다.

"한 명은 군대를 갔고, 다른 아이는 경호원, 또 한 명은 대학생이 됐다고 했습니다. 별 탈 없이 무사히 자랐다는 소식을 듣고 올해 처음으로 웃었던 것 같아요. 나머지 2명은 연락이 안 되데요."

이날 김씨를 찾아온 김군은 "아저씨 덕분에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누가 나를 도왔는지는 몰랐지만, 이왕이면 나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간호대에 갔습니다. 솔직히 의대 갈 점수는 안 됐고요."

김씨와 김군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듣고 있던 부인 이씨가 "우리 자식들은 학원 한 번 보내지 못하고 키웠는데 생판 남에게 몇십만원씩 돈을 부쳐주는 남편이 한때는 참 야속했다"며 "오늘 보니 학생들이 잘 커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김씨의 '첫 장학생'이었던 '점심 굶던' 학생은 경호원 일이 겹쳐 못 내려왔다. 그는 "아저씨는 통장에 입금자 이름 대신 '건강해라' '밥 많이' 같은 문구를 찍어 주셨다"며 "내가 이만큼 된 건 아저씨 덕분"이라고 했다.

오후 8시쯤 김군이 일어섰다. 그는 배웅하는 김씨 손에 하얀 봉투를 건네고는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과외해서 번 겁니다. 얼마 안 됩니다. 내년 생신 때도 올게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김군은 김씨가 많이 아픈 줄은 알지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은 모른 채 떠났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1만원짜리 지폐 20장이 들어 있었다. 김씨가 혼잣말을 했다.

"오야. 내년에 보재이."

암투병중인 김광남씨가 옛날 교직원시절 도움을 준 학생을 생일에 초대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