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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가족과 가정에 대하여

[스크랩] 아버님 확인 해 보세요

by joolychoi 2007. 4. 3.

 

 

이 사실(史實)을 다루기 전에 먼저 알아 두어야 할 상식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유교적 풍습(儒敎的風習)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처럼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려말선초(麗末鮮初) 사람들도 조상을 숭상하고 제사를 모시고 했지만 지금과 같은 관혼상제(冠婚喪祭) 풍습이나 항렬체계, 족보제도 등은 대체로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 등에 의하여 정립되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고려시대 돌아가신 분의 산소는 매우 찾기 어려워서 문성공 최아를 제외한 전주최씨 중에서 고려시대 돌아가신 분의 산소는;
전서공 최득평(평도공 최유경의 할아버지) 산소(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문정공 최재(평도공 최유경의 아버지) 산소(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대호군공 최용각(문성공 최아의 아들) 산소(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세분의 산소가 전부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첨부된 그림을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자
첨부된 그림은 전주최씨 문성공계 중랑장공파 족보에 수록된 것으로 가운데 맨 위에 “월당공 산소(庚坐)”, 그 아래에 “연촌공 산소(酉坐)”, 그 아래에 “의총(疑塚, 문성공 산소, 총은 주인을 모르는 무덤)”, 그리고 연촌공 산소와 의총 사이에 “네 개의 주인 없는 무덤(四古塚)”이 표기되어 있다.
한편 오른쪽에 “문성공 이하 2대 제단”과 “재실(주덕재)”. 그 오른편 능선에 “소윤공 산소”와 “사정공 산소”가 표기되어 있으며 “연촌공 산소”에서 10시 방향으로 “명덕산” 이 표기되어 있는데 명덕리의 “송애공의 산소”를 표현한 것으로 족보에는 송애공 산소가 주덕산 선영 서쪽 산기슭(墓在周德山先塋西麓)에 있다고 적혀 있어서 이 모두가 주덕산 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축척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한 것으로 실제는 월당공 산소와 연촌공 산소는 상당한 거리로 계단(첨부 사진)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연촌공 산소와 의총과의 거리는 산소를 능침(陵寢, 능은 주인이 있는 무덤)으로 꾸민 탓도 있겠으나 수십m에 불과한 매우 가까운 거리이다.  또 소윤공 산소도 주덕재 바로 옆에 있어서 그림에서 느끼는 계곡 건너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곳은 원래 중랑장공파(월당공 후손)의 선산(先山)으로 맨 위에 월당공 최담의 산소가 있고 그 아래 정면에 연촌공 최덕지의 산소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작은 골짜기(지금 주덕재가 있는 자리)를 건너 소윤공 최득지의 산소가 있고 왼편으로 산기슭을 돌아 명덕리 토정에 송애공 최광지의 산소가 있는데 이 세분의 산소 높이가 대체로 비슷한 위치(등고선)에 있어서 아버지 월당공을 중심으로 형제들의 산소가 배치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연촌공(주역에 능통 했다고 한다)이 터를 잡은 선산으로 연촌공은 현재 연촌공 산소 자리를 소윤공 산소 자리로 소윤공 산소 자리를 자신의 산소 자리로 정해 두었는데 소윤공의 상여(喪輿)가 지금 소윤공 산소 자리에서 잠시 쉬었는데 상여가 움직이지를 않으므로 연촌공이 “이 자리를 형님께서 가지시요”하고 말하므로 그 곳을 소윤공 산소로 하여 두 분의 산소 위치가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윤공은 1455년 7월 6일, 연촌공은 1455년 4월 5일에 각각 돌아가셨으므로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곳 선산은 조선 초기부터 연촌공파가 유지 관리를 해 왔는데 조선 말기(1700년대)에 이르러 자신의 뿌리를 찾고 족보를 만드는 사회 풍조가 나타나면서 비로소 시조 문성공 산소에 관한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감찰공 최세영은 족보 초성일권(草成一卷. 1686년(숙종 12년) 감찰공이 처음 만든 문성공계 족보)에 “문성공 산소는 주덕산에 있다고 한다.(文成公墓在周德山云, 감찰공은 "문성공 산소가 주덕산에 있다고 하는데 어디인지 알 수 없다"라고 기록했다.)”라고 적었고 또 옛날 노인들이 입으로 전해 오기를 “문성공의 현손 연촌공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주인 없는 무덤 너머에 있는 무덤이 문성공 산소이다.(故老相傳文成公玄孫烟村公墓前越四古冢下有大人葬公墓云)”라고 하지만 정작 이곳 선산을 지켜 온 연촌공파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문성공 산소(의총)의 진위여부(眞僞與否)는 무수한 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대체로 지금까지 선산을 유지관리 해 온 중랑장공파(특히 연촌공파)는 “그 곳은 문성공 산소가 아니다”라고 주장 했고 그 외 안렴사공파, 대호군공파, 판사공파는 “그 곳이 문성공 산소가 확실하다”라고 주장하여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결국 1796년(정조 20년)에 후손 네 파가 합의하여 의총을 발굴을 해 보았으나 지석(산소의 주인에 관한 내용을 적어 묻은 돌) 등 산소의 주인을 확인 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확보 할 수 없었으므로 논란은 더욱 확대 되었다.
결국 중랑장공파를 중심으로 한 “주인을 모르는 무덤을 시조묘(始祖墓)로 인정 할 수 없으니 제단을 쌓고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덕재 뒤편 제단각에서 단제를 올리는 사람들을 단제파(壇祭派)라 부르고 그 외의 “문성공 산소가 확실 하므로 산소에서 묘제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묘제파(墓祭派)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에 관하여 중랑장공파(단제파)가 세운 문성공 제단 비문(이 비문은 순조 21년(1820년) 경기전령 이병운이 지었다)에는;
“..... 전주 소양면 주덕산 분토동은 전주최씨의 선산이고 또 옛날 노인들의 입을 통하여 문성공의 현손(손자의 손자) 존양당공(연촌공) 최덕지의 산소 앞에 있는 네 개의 옛 무덤 너머에 있는 어른 무덤이 공의 산소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정조 병진년(1796년)에 봉분을 열고 발굴 조사를 하였으나 광(시신을 묻는 구덩이) 위에는 넓은 돌 하나가 덮여 있을 뿐 다른 유물이나 공의 산소라고 증거 할 만 한 자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해 정사년(1797년)에 후손들이 합의하여 거기에서 북쪽으로 수궁허(활 사정거리(射程距離) 몇 배의 거리. 수 백m 정도)에 제단을 쌓고 위토(爲土. 제사 경비를 목적으로 준비 한 땅)를 두어 매년 3월 3일에 제사를 올리니 전해오는 이야기만 그대로 믿기 어렵다.(全州所陽面周德山粉土洞爲崔氏世葬之地玄孫存養堂德之墓前越四塚有一大人葬故老相傳謂公墓正廟丙辰開審封瑩惟有一廣石覆壙上餘無可驗遂因舊改封翌年丁巳以諸宗議規其北數弓許說壇置位土每歲三月三日行一祭之禮盖不敢不以傳疑之處之也)....”라고 적혀있다.

산소를 발굴 조사 했으나 물증을 찾을 수가 없으니 논란은 더욱 거세어지고 거칠어져서 이런 와중에 사람이 죽고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던 것 같다.
단제파는;
“문성공 산소가 확실 하다면 어떻게 조상의 산소 위에 후손들의 산소를 만들겠는가?”
라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묘제파는;
“연촌공파가 연촌공 산소를 도장(盜葬, 몰래 산소를 만듬) 했다”고 주장 했고 지금도 그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하여 연촌공파는
“지금까지 우리가 이곳 선산을 지켜 왔는데 이제 갑자기 나타나 이상한 소리 한다”
고 말하며 그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근래에 이르러 중랑장공파도 일부 묘제에 참여하고 있어서 묘제파와 단제파의 첨예한 대립은 약간 누그러지는 듯 하다.

이러한 여러 주장들을 떠나 상식(常識) 선(線)에서 선산의 산소 배치를 살펴 볼 때 비록 조선 초기와 요즈음의 사회와 풍습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묘제파가 주장하는 문성공 산소(의총)는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지금까지 그 선산을 만들고 유지 해 온 중랑장공파가 그 산소가 문성공 산소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선산의 구도(構圖)에서 문성공 산소는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연촌공 산소가 도장을 한 것이라면 그 위에 있는 월당공 산소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자신의 증조할아버지 산소 위에 산소를 만드는 경우는 없으므로, 그러나 묘제파는 월당공 산소를 도장 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또 단제파의 원리주의(原理主義)적 주장도 문제가 있는 것 같다.(묘제파는 시대 조류를 따라 매년 양력 3월 마지막 일요일에 제사를 올리지만 단제파는 아직도 조선시대 풍습을 그대로 따라 매년 음력 3월 3일에 제사를 올리는 경직성이 있다)
설령 그 자리가 문성공 산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그 자리에 가묘(假墓)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곳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과 아무런 지리적 연고가 없기는 마찬가지인 제단에서 제사를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문충공계는 만육공 산소 부근(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대승동)에 문충공 최군옥 이하 전체의 제단을 산소 형태로 만들어 두고 있지 않은가?

출처 : 全州崔氏 文成公子孫
글쓴이 : 한국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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