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보 통합론의 배경이 되는 문열공 최순작 후손설의 논란
文成公(全州崔氏 文成公子孫의 始祖 崔 阿)이 文烈公 崔舜爵(문열공 최순작)의 후손이란 說은 監察公 崔世榮이 族譜 草成一卷을 만들 당시에도 있었지만, 그 때보다 지금에 와서 더욱 脚光(각광)을 받고 있으며, 감찰공의 警告(경고)에도 불구하고 全州崔氏 文烈公系와 文成公子孫의 일부에서 두 계보를 合譜(통합)하기로 합의를 할 정도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말 할 수가 있겠다.
始祖 崔舜爵(文烈公 ?-1108) 五代 崔得枰(1308-1313 벼슬) 崔直枰 崔立枰(上護軍公) 七代 崔龍生 崔龍角 崔龍甲 崔龍鳳
十代 崔自進
이지만 43세의 나이 차이가 있다. 최입평이 3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이 說이 眞實이라면 문정공과 월당공은 적어도 70-80세 이상 나이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文貞公과 月塘公 사이 3 세대 간의 나이 차이 43 세는 文烈公에서 文貞公사이 6 세대에서 한 세대 평균 나이 차이 45 년보다도 짧은 기간이다.
30세 정도 나이가 많은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러나 文成公은 전서공과 함께 고려 충숙왕 때 벼슬을 했고 文成公이 고려 조정에서 가장 높은 벼슬인 門下侍中일 때 전서공은 선부전서라는 벼슬을 하고 있었다. 문하시중은 젊은 사람이 결코 오를 수 없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몰아내고 1308 년에 복위 1313 년까지 5 년간 재위했고, 충숙왕이 26 년간(1313~ 1339) 재위했으므로, 文成公이 벼슬에 나가 문하시중이라는 최고 직위에 오르는데는 적어도 20~30 년이란 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므로 文成公 역시 전서공처럼 충렬왕 때 벼슬에 나갔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관료)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文成公이 문정공보다 나이가 20-30세 이상 많지 않았을까?
있는 방법은 단 하나로, 시랑공 최정신의 아들은 上護軍公, 시랑공 최직평, 전서공의 순서로써 3 분 형제간의 나이 차이가 20 세 이상 크게 나는 경우 밖에는 있을 수 없다.
수는 없지만 문열공에서 文貞公까지 한 세대에 평균 45년 차이가 나는 세대를 그대로 믿을 수가 있을까?
훨씬 넘는 나이에 아들을 낳아야만 가능할 것인데 45년은 당시의 평균 연령보다 훨씬 긴 기간이다.
科學(과학)과 醫學(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現代에도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50세 年齡 (연령)에서 出産(출산)이 고려시대에 과연 가능했을런지! 사망했다. 그러나 上護軍公이 3형제 중 막내이고 중랑장공이 4형제 중 막내이다. 가능성이 충분하고 벼슬이 사온서 직장 동정이라는 하위직(下位職) 이므로 사망 당시 대체로 30대 정도의 나이일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사온동정공이 30세에 사망했다 하더라도 文貞公과 21세 나이 차이에 불과한데 어찌 사온동정공이 文貞公의 손자가 될 수 있을까?
한 번 세심(細心)하게 살펴보면
(....父得枰歷事忠烈忠肅忠宣官至選部典書祖正臣中郞將曾祖佺保勝郞將高祖南敷 知工部事五世祖崇中郞將六世祖純爵神虎衛上將軍)"
선부전서에 이르렀다. 공의 할아버지는 정신으로 중랑장이고, 증조부는 전으로 보승랑장이며, 고조부는 남부로 지공부사였고, 5대조는 숭으로 중랑장이며, 6대조는 순작으로 신호위 상장군이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열공이 文貞公의 6대조인 것은 확실하지만, 1108 년에 돌아가신 분이라는 증거가 없다. 살고 있었다.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은 나이로 上護軍公은 전서공의 동생이 아니다.
文貞公을 낳았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되지만, 그렇다고 上護軍公과 전서공의 관계는 바뀌지 않으며, 이는 上護軍公이 시랑공의 아들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강력히 視事(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에 上護軍公이 시랑공의 아들이라면, 上護軍公이 장남, 전서공이 막내이며 두 사람의 나이는 적어도 20-30세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있지만 文成公이 문열공의 후손이 아니라는 검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 당시 전주에는 많은 전주최씨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가능성으로만 생각해 보면 文成公은 文烈公의 후손이 아닐 가능성이 文烈公의 후손일 가능성보다 더 크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一源分派同宗(같은 조상에서 나누어 진 후손)은 틀림없으니, 비록 考證은 하지 못했으나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無窮焉相傳(후대에 전하리라.)" 라고 하였으므로, 같은 혈족임은 확실 하고 어쩌면 위의 世系表(세계표)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어지는 후손일지도 모른다.
文烈公 崔純爵 (문열공 최순작)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고 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1108년 9월에 돌아가셨다고 되어 있으나 고증 해 보면 잘못된 연대인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열공이다.
고려 숙종때(1095 - 1105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종때(1105년 - 1122년) 이부시랑을 역임 한 후, 판예부상서 겸 예문제학을 지내시고 1151년에 돌아가셨다.
고려 의종때(1146년-117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부상서를 지내고, 대장군으로 수문전 태학사를 겸했다. 1200년에 돌아가셨고 시호는 문강공이며, 全州伯에 봉해졌다.
1226년(고려 고종 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좌우위 정언, 전중어사, 중정시랑을 거쳐 김해 부사를 지냈다. 원종때(1259-1274) 임연의 독재를 타도하려 하다가 실패하여 10여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더 이상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주최씨 문정공계 중시조 문정공 최재의 아버지이다. 선부전서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공경을 받았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여러 차례 사람들의 미움을 사서 조정에 참소 되기도 했다.
예부시랑을 지냈다고 하나 후손은 전해오지 않는다.
安止(고은 안지)가 적은 조선 왕조의 족보 선원보록에는 "李夢(이몽)의 부인은 전주최씨로 判事公 崔龍甲의 딸이다. 판사공은 고려시대 직제학을 지냈다. 판사공의 아버지는 文成公 崔阿로 고려 시대 시중이었다. 판사공의 할아버지는 고려시대 上護軍을 지낸 사람으로 諱는 崔立枰이다."라고 되어있다.
文成公 崔阿 (문성공 최아) 完山君이라는 尊號를 받았다.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태어나고 돌아가신 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1303년에 태어나 1330년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고 1352년 집의가 되었다. 星山君의 존호를 받았으며, 중광대문하시중을 지냈고 1378년 10월에 돌아가셨다.
1350년 고려 조정에서 지평 벼슬을 하다가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다. 원나라 내시들과 연결된 姦臣들의 죄를 들추어 폭로하여 내시 朱元之(주원지)가 왕에게 참소하여 파직되어 경상도 사천으로 귀양을 갔다.
공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시제 보문각 대제학에 오르고 무관으로도 검교대호군이 되었다고 完山誌와 삼강록에 적혀있다.
소년등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320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1323년 12월 안축, 조렴과 함께 원나라 빈공과에 급제하여 銀甁(은병) 50냥과 쌀 100석을 상으로 받았으며 벼슬이 이부상서, 판사, 삼중대광에 올랐다.
중랑장을 지냈다.
고려 말기에 사온서 직장 동정을 지내셨다고 전해오며 태어난 해와 돌아가신 해 그리고 墓所의 위치 등에 대하여는 記錄되어 전해오지 않는다.
호는 月塘이다. 17세에 사마시에 1377년에는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에 계신 어머님을 모시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가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1396년 중신들의 추천을 받아 봉상시 소경이 되고, 1398년 중훈 대부 진주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0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시와 글을 벗삼아 살았는데, 1416년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통정대부 검교호조참의 집현전 제학에 제수 되었다.
牧隱 李穡 (목은 이색)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였고, 정몽주, 김구용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성리학을 일으켰다. 문정공 최재의 제자라고 한다.
草成一卷 (초성일권)
문성공계의 족보로 1683년(숙종 9년)에 시작하여 1686년(숙종 12년)에 완성되었다. 시조 문성공에서 시작하여 13세까지의 족보가 적혀있다.
司온署 (사온서)
양온감으로 바꾸어 부르고, 다시 1362년부터는 사온감으로 부르다가, 또 다시 1369년에는 양온서로 바꾸는 등, 여러번 그 이름이 바뀌었으나 1372년부터 사온서로 불리었다.
2령으로 조직되었다. 상장군(정삼품) 1명, 대장군(종삼품) 1명, 장군(정사품) 7명, 중랑장(정오품) 14명, 낭장(정 육품) 35명, 별장(정칠품) 35명 등이 있었다.
잡작국, 전약서, 영조국, 직염국, 의영고, 상서사, 상만고 등에 있었다. 품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6품에서 9품까지 있었다. 현재의 전문 기술직 공무원에 해당 하는 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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