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개 내 (Gaenea)
정약용과 목민심서로 배우는 지혜

[스크랩] [인터뷰] <목민심서> 저자 다산 정약용

by joolychoi 2007. 2. 6.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찾아 갔다. 막 서문을 얹은 <목민심서>에 관해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다. 때는 순조 21년 신사년(1821) 늦봄이었다. 선생께서 강진에서 18년간 긴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 한강변 마재에 돌아온 지 3년째다. 인터뷰는 여유당에서 이뤄졌다.


저서 이름을 ‘목민심서’라 했는데 목민(牧民)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요?

  백성을 기른다는 뜻이다. 옛날 중국의 순 임금은 요 임금의 뒤를 이으면서 12목(牧)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백성을 기르게[牧民] 했으며, 주나라 문왕이 정치를 할 때는 사목(司牧 지방 장관)을 목부(牧夫) 즉 백성을 기르는 사람이라 했으며, 맹자는 평륙에 가서 가축 사육하는 것을 백성 기르는 것에 비유했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 기르는 것을 목(牧)이라 하는 것은 성현이 남긴 뜻이다.


목민이란 지방장관 또는 지방의 수령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목민이라는 이름에 옛 성현의 뜻이 담겨있군요. 그러면 심서(心書)라고 이름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요.

  백성 다스릴 마음(心)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心書)’라 이름한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있군요. 이제 유배생활도 해제되었고 다시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펼 수 있었으면 하는데, 요새 정치상황으로 보아서는 난망입니다. 그래도 선생께서는 일찍이 지방관의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 전에 선친께서 지방관을 할 적에 따라간 적도 있고요. 아무래도 이러한 경험이 이 책에 배어있을 듯합니다만.

  나의 아버지께서는 조정의 인정을 받아, 연천 현감(漣川縣監)ㆍ화순 현감(和順縣監)ㆍ예천 군수(醴泉郡守)ㆍ울산 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ㆍ진주 목사(晉州牧使)를 지냈는데, 모두 잘 다스린 공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때 따라다니면서 배워서 들은 바 있고 보아서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효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 쓸 곳이 없게 되었다.


유배생활 초기를 비롯하여 주로 경학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목민심서는 경세학에 속하는 것 아닙니까.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한 지 18년 동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되풀이 연구하여 수기(修己: 자기 수양)의 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의 절반에 불과하다.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 자기 수양)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인 것이다.


목민을 학문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말씀하셨는데, 그 외에도 이 책을 지은 절실한 뜻이 있을 것 같은데요.

  요즈음의 지방 장관이란 자들은 이익 추구에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은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곤궁하고 피폐하여,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구렁텅이에 가득한데도 지방 장관이 된 자들은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해주시겠습니까?

  중국 역사서인 23사(史)와 우리나라 역사 및 문집 등 여러 서적에서 옛날 지방 장관이 백성을 기른 자취를 골라, 위아래로 뽑아 정리 분류한 다음, 차례로 편집하였다. 남쪽 변두리 땅에서는 전세(田稅)와 공부(貢賦)를 간악하고 교활한 아전들이 농간을 부려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났는데, 내 처지가 낮았으므로 들은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이것 또한 분류하여 기록하고 나의 얕은 소견을 덧붙였다.


책의 목차를 보니 모두 12편으로 되어 있습니다. 1은 부임(赴任), 2는 율기(律己), 3은 봉공(奉公), 4는 애민(愛民)이요, 그 다음은 차례대로 육전(六典: 육조(六曹)의 집무 규정)이 있고, 11은 진황(賑荒), 12는 해관(解官)입니다. 12편이 각각 6조(條)씩 나뉘었으니, 모두 72조가 됩니다. 책 구성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ㆍ봉공(奉公: 공을 받듦)ㆍ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을 세 가지 기(紀)로 삼고, 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을 6전(典)으로 삼고, 진황(振荒) 한 단원으로 끝맺음하였다. 편(篇)마다 각각 6조씩을 담게 하여 모두 72조다. 여러 조를 합하여 한 권을 만들기도 하고, 한 조를 나누어 몇 권을 만들기도 하여 통틀어 48권으로 하나의 저서가 되었다. 비록 시대습속의 현실에 따라서 위로 선왕(先王)의 헌장(憲章)에 부합되지는 않겠지만, 백성 다스리는 데는 조례(條例)를 갖춘 셈이다.


지방장관의 시작과 끝에 맞추어 부임과 해관이 있고, 그 안에 율기, 봉공, 애민이 총론격이고, 나머지가 각론이라 할 수 있겠군요. 또한 자신을 다스리고, 공을 받들고, 백성을 사랑하는 세 가지는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라는 뜻도 담겨있구요. 이로써 지방관의 모든 업무를 총괄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고려말에 비로소 오사(五事=守令五事: 수령이 힘써야 할 다섯 가지 일)로 수령들을 고과(考課)하였고, 조선에서도 그대로 하다가 뒤에 칠사(七事)로 늘렸는데, 수령이 해야 할 일의 대강만을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수령이라는 직책은 관장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여러 조목을 열거하여도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스스로 생각해서 시행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첫머리의 부임(赴任)과 맨 끝의 해관(解官) 2편을 제외한 나머지 10편에 들어있는 것만도 60조나 되니, 진실로 어진 수령이 있어서 제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 방법에 헤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널리 읽히고 후세에도 전해졌으면 하는데 이런 종류의 책이 과거에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도 목민에 관한 서적이 있었으나 오늘날 거의 전해 오지 않고 음란한 말과 기괴한 글귀만이 일세를 횡행하니, 내 책인들 어찌 전해질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주역(周易)》대축괘(大畜卦)에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이나 행실을 많이 알아서 자기의 덕을 쌓는다’ 하였다. 이 책을 지은 것이 본디 내 덕을 쌓기 위함이지, 어찌 꼭 목민에만 있다 하겠는가.


지나친 겸손의 말씀입니다. 책의 맨 앞부분을 보니, 능력이 없으면 다른 벼슬은 몰라도 목민관 벼슬은 구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끝으로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있는 것인가?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목민관이 무능하면 그 폐해가 고소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내가 옛날과 오늘의 사례를 조사 망라하고 간사함과 거짓됨을 파헤쳐 이 책 <목민심서>를 목민관에게 주니,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 / 김태희(다산연구소 기획실장)



--------------------------------------------------

인터뷰 내용은 목민심서의 서를 재구성한 것이다. 원문을 덧붙인다.

다만 마지막 대목은 '원목'과 '자찬묘지명'에 나온 내용이 추가되었다.


牧民心書序


昔舜紹堯 咨十有二牧 俾之牧民 文王立政 乃立司牧 以爲牧夫 孟子之平陸 以芻牧喩牧民 養民之謂牧者 聖賢之遺義也 聖賢之敎 原有二途 司徒敎萬民 使各修身 大學敎國子 使各修身而治民 治民者牧民也 然則君子之學 修身爲半 其半牧民也 聖遠言堙 其道寢晦 今之司牧者 唯征利是急 而不知所以牧之 於是下民
困 乃瘰乃瘯 相顚連以實溝壑 而爲牧者方且鮮衣美食以自肥 豈不悲哉 聖朝監二縣守一郡護一府牧一州 咸有成績 雖以鏞之不肖 從以學之 竊有聞焉 從以見之 竊有悟焉 退而試之 竊有驗焉 旣而流落無所用焉 窮居絶徼十有八年 執五經四書 反復研究 講修己之學 旣而曰學學半 乃取二十三史及吾東諸史及子集諸書 選古司牧牧民之遺跡 上下紬繹 彙分類聚 以次成編 而南徼之地 田賦所出 吏奸胥猾 弊瘼棼興 所處旣卑 所聞頗詳 因亦以類疏錄 用著膚見 共十有二篇 一曰赴任 二曰律己 三曰奉公 四曰愛民 次以六典 十一曰賑荒 十二曰解官 十有二篇 各攝六條 共七十二條 或以數條合之爲一卷 或以一條分之爲數卷 通共四十八卷 以爲一部 雖因時順俗 不能上合乎先王之憲章 然於牧民之事 條例具矣 高麗之季 始以五事 考課守令 國朝因之 後增爲七事 所謂責其大指而已 然牧之爲職 靡所不典 歷擧衆條 猶懼不職 矧冀其自考而自行哉 是書也 首尾二篇之外 其十篇所列 尙爲六十 誠有良牧 思盡其職 庶乎其不迷矣 昔傅琰作理縣譜 劉彝作法範 王素有獨斷 張詠有戒民集 眞德秀作政經 胡大初作緖言 鄭漢奉作宦澤篇 皆所謂牧民之書也 今其書多不傳 唯淫辭奇句 霸行一世 雖吾書惡能傳矣 雖然易曰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 是固所以畜吾之德 何必於牧民哉 其謂之心書者何 有牧民之心 而不可以行於躬也 是以名之
當宁二十一年辛巳暮春 洌水丁鏞序

출처 : 인왕산 호랑이
글쓴이 : 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