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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축제

[스크랩] 바우덕이 축제 풍경

by joolychoi 2006. 12. 23.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바우덕이는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로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이다. 조선시대 안성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출생했으며, 5세때 안성 청룡사 안성남사당에 입단했다. 15세때 안성남사당 꼭두쇠로 추대되어 조선시대 유일의 남사당패 여성 꼭두쇠가 되었다.


바우덕이는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중건 현장에 안성남사당패를 이끌고 출연하여 뛰어난 기예(技藝)를 선보였으며, 이에 대원군으로부터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남사당패는 ""바우덕이""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전국을 다니며 공연활동을 펼쳤다. 바우덕이는 1870년 폐병에 걸려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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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중문화의 원류를 찾는 중심점 에서는 항상 사당패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바우덕이라는 유일무이한 여자 꼭두쇠가 사당패를 대표한다. 즉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를 개척한 인물로서 연예의 효시가 되는 것이다.


사당패 중에서도 안성남사당 패에는 바우덕이라는 특별한 영혼과 능력을 갖춘 개성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탁월한 능력으로 경복궁 중건에 동원되어 사기가 떨어진 많은 공역자들과 백성들에게 신명의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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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덕이가 공연을 할 때는 얼마나 신명이 났던지 공역자들은 등짐에 짐도 지지않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얼수 얼쑤' 흥을 어우르기만 했다는 일화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감흥과 신명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당시의 이 사건은 매우 큰 충격이였다. 민중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대중이라는 개념도 없었던 시기에, 대중문화 특히 연예의 힘인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은 바우덕이가 이끈 천민 잡단인 안성 남사당 패에 당상관 정삼품의 벼슬을 내려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안성남사당패 영기에 걸어준 옥관자였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일이었다. 유랑 천민집단이 당상관의 고관벼슬을 받은것도 그러려니와 일개 놀이패에 벼슬을 내린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망건의 관자놀이에 매는 가락지처럼 생긴 관자로 상놈은 목관자, 양반 중에서 당하관은 물소뿔 관자, 당상관은 옥관자나 금관자를 사용했음)


이렇게 정삼품을 받은 사당패 깃발을 앞세우고 가면 전국의 모든 사당패가 절을 드렸다. (만장기를 숙여서 예의를 표시함)고 하는데 당상관에 대한 예우의 사정을 미루어 볼 때 이 또한 사실이라 하겠다.

 

안성 남사당 패는 전국 어디에서건 공연이 가능한 최초의 전국구 공연단체가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바우덕이가 이끌던 안성 남사당패는 "바우덕이" 라는 인물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우덕이가 왔다" "바우덕이다" 로 불렸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름의 대중화는 우리나라 문화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바우덕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스타로서 인정을 받는다. "남사당패"가 왔다가 아니라 "바우덕이"가 왔다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나라 연예가 시작된 것이며 민중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이 형성된 일대 사건이라 할 것이다.


방년 23세, 꽃다운 나이. 안성 고을의 이름난 여사당 바우덕이가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 미색이 아름다워 양귀비는 능가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그녀였지만 죽음의 신만은 뿌리칠 수 없었는가 보다.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불교식으로 화장하여 안성 청룡사 개울에 뿌렸다.


뭇남자들치고 바우덕이 한 번 만나는 게 소원 아닌 자가 없었다. 바우덕이는 소고에 특히 능했다. 남사당패는 개다리패, 오명선패, 심선옥패, 안성 복만이패, 안성 원육덕패, 이원보패 같은 패거리 이름만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중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던 청룡사 사당하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바우덕이다.


그의 남편 역시 남사당이었다. 바우덕이가 죽을 당시, 그의 남편은 나이 마흔두 살의 장년. 떠꺼머리 수총각으로 이십 년 세월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얻은 부인이었다. 어린 아내가 죽자 그는 매일같이 바우덕이와 놀던 바위에 올랐다. 사람들은 아내 때문에 실성했다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찼다. 그는 바위에 올라가서는 나발을 불고 장고를 치거나, 때로는 노래를 불렀고, 울기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다가 어느 날 그 역시 홀연히 사라졌다.

 

이상 웹에서 발췌 이하는 네이버 발췌

 

 

 

 

바우덕이의 전통을 이어받으려는지 오늘 줄을 타는 사람도 앳된 15세의 여학생입니다. 신명나는 꽹과리 소리와 장구소리에 흥을 맞추다보니 어느새 오늘의 어름사니가 줄을 타고 올라옵니다.

 

 

 

 

 

 

더 많은 사진과 원본은

http://blog.naver.com/fly4you?Redirect=Log&logNo=30009415952

 

 

 

북한이 사고를 쳐버렸소.

이런 때 바우덕이를 생각하오.

 

정치라는 것이

줄타기가 아니겠소.

 

김정일이 줄을 잘 타는지

노무현이 줄을 잘 타는지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관객은 맘을 졸이는데

 

15살 바우덕이 이겨냈듯이

바우덕이 마음으로 이겨내야 하오.

 

 

 

아래는 다른 블로그에서

 

http://new.photo.naver.com/ArticleRead.nhn?did=101&articleNum=20051011001606380

 

 


이 분은 예전에 민속촌에서 뵌 적이 있소.

 

 


왕의 남자 때문에 고난도 묘기가 추가되었소.

 

 

 

출처 : 달마실..!!
글쓴이 : 솔숲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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