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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체닦기 아르바이트 있으면 내가 할께"

by joolychoi 2006. 11. 15.

 
삶의 마지막 메이크업 아티스트 - 장례지도사

 
 

 


                                                                                        이재영 명예기자 redin4u@naver.com 
 
 

▲ 육중한 철문은 생사의 경계이다. 그는 하루에도 몇번씩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공간을 넘나든다. ©구굿닷컴

"터진 곳은 꿰매주고, 떨어져 나간 곳은 솜으로 채워넣어 압박붕대로 감고, 비틀어진 건 바로잡고 한 다음에 깨끗히 닦는거지. 그리곤 깔끔하게 스킨도 바르고 로션도 바르고 영양크림도 발라줘. 여자라면 립스틱도 칠해주고 눈썹도 그려주고. 남자라면 면도도 해주고. 그렇게 몇시간 땀을 흠뻑 흘리고 밖에 나왔을 때 가족들이 울면서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소리가 제일 보람스러워. 내가 좋은 일 했구나 하고 느껴." 

 

경기도립 의정부병원 관리과에 근무하는 구교현씨(53). 그의 공식 직함은 '장례지도사'이다. 이 생소한 직함은 한 때 '염사' 혹은 '염쟁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사자(死者)의 시신을 닦는 일, 이것이 그의 직업이다. 말끔한 양복차림에 지적이기까지 한 안경너머의 시선은 그가 하는 일을 상상키 힘들게 만들었다. 세월의 조각칼이 두겹 세겹 깎아내 만든 주름 사이로 가끔 퍼지는 환한 웃음을 보았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뒤늦게 시작한, 정말 내가 가야할 길

 

"처음엔 호구지책으로 시작했어. 사업도 부도나고, 집사람이랑은 합의해서 헤어지고. 전전긍긍하다가 당숙의 권유로 시작했어. 처음엔 싫다고, 내가 그런걸 어떻게 하냐고 거절했었어. 그러다가 이 길에 들어선 지 한 달만에 이게 정말 내가 갈 길이라는 걸 느꼈어."

 

그는 잘 나가는 중년이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고 지는 것도 싫어했다. "그 땐 정말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았어." 거칠 것이 없었던 그의 삶은 불혹을 앞두고 세상의 나락 끝에 떨어졌다. 내 것이라 여기고 함부로 대하던 아내와는 합의 이혼했고, 오랜 경제불황으로 사업은 부도를 맞았다. 사자굴에 갖힌 토끼의 심정으로 그는 어렵게 이 길을 택했다.

 

"여기 있으니까 맨날 허무한 것만 보잖아. 가끔씩 아들 또래 되는 젊은 사람이 죽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인생이란게 이런거구나 싶어.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허무한건데. 내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 손해보고, 둥글둥글 그렇게 사는게 최고구나....."

 

그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밑바닥부터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종일 그에게 주어진 일과란 화장실 청소와 휴지통 비우기 뿐이었다. 악착같이 버텨냈다. 그러던 어느날, 선배가 영안실로 그를 불렀다. 작업을 거들라는 말이었다. 그는 들뜬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무엇인가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갈색 같기도 하고 보라색 같기도 했다. 선배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난 정말 그땐 그게 시신인줄 몰랐어. 마네킹인줄 알았지. 알고보니 여름에 산에서 죽은지 20일 된 시신인거야. 물에 젖고 햇빛을 받고 해서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 일부러 날 시험하려고 그렇게 한거야. 근데 뭐 어떻게 해. 할 수 있다고 말했으니 이 악물고 했지. 근데 그 후로 일주일동안 잠을 못잤어. 그 시신 모습이 아른거려서."

 

그는 이 길에 발을 들여놓은지 한 달만에 아내와 다시 합쳤다. 지금 그의 핸드폰엔 아내의 전화번호가 '1번:중전'이란 호칭으로 저장되어있다. "남자가 왕이 되려면 집사람을 시녀처럼 부리면 안되. 중전으로 대접해야 남자도 왕이 되. 이건 아주 간단한 진리야." 그가 출출할텐데 같이 먹자며 도시락을 꺼낸다. 유부초밥과 한 입크기의 주먹밥이 가득 담겨 있다. 장정 셋이 먹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양이다. 정성이 담긴 재료들이 '난 집에서 밖에 맛볼 수 없어!'라고 외치는 듯 하다. 딱, 그가 되찾은 행복의 양만큼의 도시락이 식탁에 펼쳐졌다.

 


 

▲ 애절한 부정(父情)이 눈가에 아롱지어 반짝인다. 애꿏은 담배만 새빨간 비명을 지른다. ©구굿닷컴

 

 

부르지 못한, 부르고 싶었던 아들의 이름

 

넉 달 전 그는 아들을 잃었다. 스물 네살의 둘째 아들이었다. 세 살때부터 신장이 성치 않은 아이였다. 아들은 컴퓨터를 좋아했다. 혈압 쇼크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조차도 노트북을 사주지 않으면 입원도 않겠다고 버텼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노트북을 손에 들려 병실로 보냈다. 그리고 한 달 후, 컴퓨터를 좋아하던 아들은 다신 마우스를 잡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아들의 장례식을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치뤘다고 했다. 그는 흠흠, 하더니 소파에서 돌아 앉았다. 형광등의 불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들 시신을 내가 직접 염을 했어. 그 때 기분은 말로 할 수가 없지. 그거 뭐 어떻게 해. 방법이 없잖아. 통곡을 하며 닦았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렇게는 안울어봤는데. 잘해준 건 생각이 안나고 잘 못해준것만 생각이 나더라."

 

말을 마치고 그는 담배 한 모금, 커피 한 잔을 속깊이 빨아들인다. 애절한 부정(父情)이 눈가에 아롱지어 반짝인다. 애꿏은 담배만 새빨간 비명을 질러댄다.

 

"애가 너무너무 보고 싶으면 벽제화장터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글을 써. '하늘로 보내는 편지'에. 너 거기 컴퓨터 있냐. 컴퓨터 없이 살수 있더냐 하고. 자꾸 잊어버릴라고 애를 쓰지. 어제도 동문회에서 산에 다녀왔는데. 산 정상에서 걔 이름을 부르고 싶었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못했어. 이름 부르면 울까봐. 나 혼자면 상관없는데, 동문들이랑 같이 있으니 울면 안되잖아."

 

5개월만 더 투석을 하면 신장 이식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신장 이식을 해줄 사람도 대기하고 있었다. 면할 수 있는 죽음이었기에 아버지의 가슴은 더더욱 쓰라려온다. 그가 손을 힘없이 쥐었다 다시 편다. 그 때 차가웠던 아들의 마지막 감촉을 기억해내려는 듯.


 

▲ 그는 아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날이면 벽제화장터 홈페이지에 편지를 쓴다. '너 거기 컴퓨터 있냐. 컴퓨터 없이 살 수 있더냐.' ©구굿닷컴

 

 

그런 자리 있으면 나부터 좀 소개시켜 줘

 

그의 근무는 3교대, 28시간 당직형태이다. 죽음이란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것이니 한밤중에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가끔 당직을 서면서, 그는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의 젊은이들에게 전화를 받는다. 물론 안부전화는 아니다. 수화기 속의 청년들은 하나같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아르바이트를 시켜주십시오'라고 외친다. 시체를 닦는 일이 고소득 아르바이트라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누군가의 입을 타고 날아다녔다. 구당 10만원, 2인 1조로 소주를 한병 먹고 투입된다는 구체적인 스케치까지 더해져서.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정말 그런 아르바이트가 있어? 그럼 나부터 좀 소개시켜줘. 나도 돈 좀 벌어보자." 90년대 후반부터 몇몇 대학에 장례학과가 생기며 천한 대접을 받던 이 직업도 전문직이 되었다. 그는 월 240만원정도의 월급을 받으며 근무한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냐. 방법도 있고 요령도 있어야 해." 염은 크게 소염과 대염으로 나뉜다. 먼저 소염에서는 시신의 자세를 바로잡고, 외상을 봉합하거나 메운다. 30분쯤 걸린다. 다음 대염에서 시신을 깨끗히 닦고, 수의를 입히고 화장을 한다.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에 걸친 정성스런 작업이다. 어느 과정도 만만한 것이 없다. 그는 이 일이 아르바이트로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봐. 피붙이가 죽었어. 근데 그 시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 아르바이트가 손댄다면 기분이 어떻겠어? 아르바이트로 하기도 힘들지만, 해서도 안되는거야."

 

그는 시신을 염할 때 항상 정성스레 화장을 해준다. 산 사람과 똑같이 스킨로션을 바르고, 영양크림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립스틱을 칠해준다. 남자라면 쉐이빙크림을 발라 깔끔하게 면도도 해준다. 머리를 가지런히 빗기고 포마드 기름으로 마무리한다. 대학원 가정의례학과에서 메이크업에 대한 수업도 받았다. 그는 이것이 고인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자, 남겨진 가족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우리집에 ‘~사’ 가 세 명이 있어. 우리 집사람이 교회 ‘전도사’, 셋째 아들이 이번에 신학대 들어가서 ‘목사’ 될거고. 그리고 내가 ‘염사’. 내가 자식들한테 그럼 그 세 ‘사’중에 누가 왕이냐 하고 물으면 다 ‘염사’라고 해. 세뇌를 시켜 놨거든."

 

인생 마지막 순간, 가장 추할 수도 있는 순간에 그것을 정성스레 감춰주는 사람. 인생 마지막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는 아내가 정성스레 싸준 도시락에서 행복을 느끼며 밤과 함께 깊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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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GooGood.com
글쓴이 : 하파캠 화이팅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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