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어서 그럴까, 내 마음을 자꾸 들춰내고 싶은 건,, 아님 요즘 새로 시작한 블로그에 글쓰는 맛을 들여서일까,, 둘 다 일거 같다.
내게 가을은, 하늘이 너무나 청명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그래서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고 귀하게 느껴지는 계절이다.
햇살은 모든 사물에 직접 내려앉아, 내 눈에 보이는 사물이 더욱 빛이 나게 한다. 그러다 보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생동감있게 보인다. 이런 가을이 좀 더 오래 갔으면 하는 심정이다. 그런 나에게 가끔 생각나는 대로 일기를 쓸 수 있고, 내 사랑하는 아이들이 커가는 기록을 할 수 있는, 또 재미나고 맛난 세상을 스크랩이라는 기능을 통해 메모할 수 있는 블로그가 생겼다.
요건 또 나같이 오지랖 넓은 애가 세상에 알리고 싶은 내용을 기사로 꾸며 올릴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너무 사랑스러운 나의 디지털 노트인 셈이다.
워낙 변덕이 심해서 이 사랑을 꾸준히 이어갈까 모르겠지만, 요즘은 조그만 휴대용 노트북과 디카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눈에 이쁜 게 보이는 대로 이 블로그에 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이 블로그에 쓰고 싶은 말들 중 하나는 내 남편을 향한다. 사실, 스크랩 글들은 남편도 이걸 읽어봤으면 하는 바램에서 시작한다. 이건 예전의 나와는 다른 모양새다.
지난 결혼 생활 10년간 초기 3년은 분기별로, 그 후 5년은 6개월에 한 번씩, 그 다음 해들은 일년에 한번씩 이혼 서류를 찾던 내 모습을 떠올리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고백하건대, 우리는 서로 말 한마디 안하고 한 달을 버틴 적도 있었다.
내 주변 지인들은 하도 내가 남편을 씹어대니, 그런 남편과 어떻게 애 둘을 낳고 지금까지 살고 있나 의아해 하고, 나를 놀리기도 했다. 사실, 내 남편은 못 됐다.
집안의 장손인 남편은 온갖 집안 대소사를 다 챙기고, 그것도 아주 당연하고 기쁜 마음으로,,
권위적인 남편은 또한 외동딸로 자란 나에게 작은 아버님과 작은 어머님, 사촌들과 교류하며 잘 모실 것을 요청하였으며, 엄청난 효자로서 나에게 며느리 역할을 잘 하라고 푸쉬했다. 게다가 결혼 전에는 이런 내용들에 대해 언질도 한 번 없었다는 거다.
더더욱 나를 열받게 하는 것은,, 내 남편의 특이한, 독보적인 재주 때문이다.
내 남편은 엄청나게 잔소리를 잘 한다. 비평의 달인이고, 정확하게 요점을 콕 집어내는 식견을 지녔다. 게다가 그 소재는 생활 주변에 널려 있어서, 잔소리를 안 할려고 스스로 마인드 콘트롤을 하지 않는 한, 단 5분안에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이다.
언변도 좋다. 짧고 간결한 말 한마디로 기분을 나쁘게 한다. (머리가 좋은 것 같다.)
일 테면, 아침에 출근하면서 현관 입구 청소 좀 하고 살라고 하던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서 전등을 여기저기 다 켜놨다고 아끼고 살라고 하던가, TV 만화에 열중한 큰 아들래미에게 아빠 쳐다보면서 인사 안 했다고 윽박을 지르거나, 차에서 내리면서 늘어놓은 쓰레기 안 치운다고 자기가 기껏 운전해서 데리고 다녔으면 내릴 때 쓰레기라도 치우는 예의를 가지라고 소리를 지른다.
다들 맞는 말이고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문제는, 같이 있으면 쉼 없이 이런 멘트를 들어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치우면 좋겠다, 치워주면 안될까 식이 아니라 야, 치워! 식이다. 대화가 이런 식이다보니, 순종적인 캐릭터가 아닌 나와 남편이 사사건건 싸우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내가 그간 얼마나 자주 자주독립의 꿈을 꾸었었는지.. 그런데, 얼마 전부터인가 나는 이 남편 없이 사는 게 무척 고단할 거 같고 불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깨달음의 시작은 아주 단순한 거에서부터였다.
얼마 전 둘째 애 친구 엄마와 함께 돼지갈비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구워지는 고기를 뒤집거나 가위로 써는 걸 잘 못했다. 늘 남편이 해줬으니까.. 또 지난 일요일에는 소래포구에서 대하를 사서 구워먹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이 새우를 먹지 못했다. 먹고는 싶었지만, 껍질 까는 건 별로 해 본적이 없어서,, 남편이 새우를 굽느라고 내게 껍질 깐 새우를 건네주지 못한 까닭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전등 가는 거나, 애가 토한 이불을 애벌 빨래 해서 세탁기에 넣는 거나, 진흙 뻘에 들어가서 조개를 캐는 거나, 튜브를 탄 아이를 빙그르르 돌려주거나, 기계치인 나를 대신해 새로 산 가전제품의 사용법을 일일이 설명해주는 등등은 다 남편이 하는 일들이었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너무도 사소하고 당연한 것들로 여기고 살았다.
또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꼭 그걸 먹어야만 하는 나의 강렬한 욕구를 늘 존중해주었고, 홈플러스 같은 마트에 가면 이 코너, 저 코너 다 들여다보는 내 뒤를 군소리 없이 아이들 데리고 카트를 끌고 오며 잘 따라다녀줬다. 나의 고질병인 외국여행에 대해 매번 현실을 보고 살라고 구박을 하면서도, 원하는 대로 다 못해주는 것에 미안해하며 나를 동정해준다. 또한 몸이 약해서 잘 체하고, 잠도 많이 자고, 병원에 갖다 바치는 돈이 많은 마누라에게 가끔은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이 또한 안타까워해준다.
가끔은 나를 붙잡고 자기가 하는 일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어떤 맥락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해해야 하는지 등등도 상당히 진지하게 얘기를 해준다. 내가 청한 게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덕분에 나는 대강 남편이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과 일하는지, 현재 관심사는 무엇인지 알고 있다. 때론 내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질문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싶지만 암튼, 내가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하게 받는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 열 받아 하며, 상대방을 괴롭히기 위해 전력을 질주할 때도 있겠지만, 이제는 어쨌든 남편과 이혼하고 싶지 않다.
언젠가 호주에서 본 것처럼, 우리도 머리 하얀 노부부가 되었을 때 배낭을 매고 게스트 하우스에서 손 잡고 나와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싶다.
|
'편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마가 딸에게 보낸 편지 (0) | 2006.11.13 |
---|---|
[스크랩] 마음의 깊이 (0) | 2006.09.25 |
[스크랩] 가을, 연애편지 써보실래요? (0) | 2006.09.18 |
[스크랩] 결혼하는 딸에게.... (0) | 2006.08.24 |
시집 온 며느리에게 새해 당부편지 (0) | 2006.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