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의 부엌 풍경
[ 양양 송천리 김순덕 씨와 탁영재 씨가 부엌 앞에
안반을 놓고 떡메를 치고 있다. ]
그 옛날 우리네 어머니께서는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하루를시작하였다. 사랑방에 곁달린 쇠죽솥에는 겻섬에서 퍼온 겻가루와
콩깍지가 섞인 여물을 넣고, 반지르르 기름기 도는 부엌 가마솥에는
통감자 몇 알 넣어 쌀보리를
안친 뒤 불을 지폈다.
삼척 황조리에서 만난 차현자 씨가 부엌을 들여다보고 있다(위).
고성 왕곡마을의 김애자 씨가 두부를 만들기 위해
끓는 콩물을 젓고 있다(아래).
불길이 번지기 시작하면 바빠지는 건 부지깽이였다.
부지깽이는 잘 타지 않아야 하므로 생나무 줄기를 잘라 만들지만,
아무리 생나무라 해도 자꾸 불씨를 헤치다보면 금세 끄
트머리가 타서 짧아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다 너무 짧아지면
아궁이에 던져지는 게 부지깽이의 신세였다.
장작불을 피워 가마솥에 밥을 짓는 풍경은
이제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위).
홍천 율전리 문암골 귀틀집 부엌의 가마솥과 흙부뚜막(아래).
산간의 너와집이나 굴피집 부엌에는 화티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화티’란 아궁이 옆에 또 다른 작은 아궁이를 만들어 불씨를 보관해
두는 곳인데, 옛날에는 한겨울이면 이 곳에 늘 불씨를 모아두어
겨울이 끝날 때까지 꺼지지 않도록 했다.
삼척 무건리에서 만난 화티의 불씨. 화티는 아궁이 옆에
따로 불씨를 보관하는 아궁이를 말한다(위).
아궁이 불씨를 모아 그 위에 석쇠를 올려놓고 짚을 깐 다음 생선을
굽는 짚불구이. 강원도 해안지방에서는
옛날에 짚불구이로 생선을 구워먹었다(아래).
과거에는 솥이 얼마나 반들반들 윤기가 나느냐에 따라 아낙네의 바지런함이
평가되기도 했으므로, 아낙네들은 자주자주 기름 수건으로 소댕(솥뚜껑)을
닦아주어야 했다. 살림살이 가운데서도 솥은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니,
살림집을 옮길 때도 가장 먼저 떼어내고, 가장 먼저 거는 것이 솥단지였다.
구례 문수리 귀틀집 부엌에서 볼 수 있는 조왕중발(위).
산청 중산리 덕치마을 박을순 할머니가 조왕중발에
정화수를 올리고 있다. (아래).
부엌에서 음식도 만들고 아궁이에 불도 지펴야 했으므로 조왕신은 불의 신, 또는
재물의 신으로 통했다. 옛날에는 아낙네가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깨끗한 우
물물을 길어 조왕중발에 올렸다.
정선 단임골 심상복 씨댁 부엌에 걸린 성주(위).
삼척 동활리 산중 빈집 부엌에
적힌 글귀. 용과 호랑이를 한자로 적어 액을 물리치고자 했다 (아래).
옛날에는 조왕신이 올라가기 전날 밤 아궁이에 끈적끈적한 개엿을 발라 놓았다.
이렇게 하면 조왕신의 입이 달라붙어 설령 옥황상제에게 가더라도 아무 말도 전
하지 못하니 액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통영 두미도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이런 기름병
(촛병이 되기도 한다)을 볼 수가 있다(위).
삼척 대이리 굴피집 부엌 지붕에 걸린 온갖 부엌 세간들(아래).
아궁이가 있는 곳에 모두 솥을 걸고 부뚜막을 두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 사랑방이나별채 같은 곳에는 마루 밑이나
봉당에 군불 아궁이만 두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함실 아궁이라 불렀다. 한뎃부엌이라는 것도 있다.
부엌은 여인네의 공간이었던만큼 조리와 바가지, 도마와 같은 기본적인 조리기구에서
부터 살림에 필요한 무수한 세간을 두는 창고이기도 했다. 예부터 세간 중에 가장 중
요시한 것은 부엌 세간이었고, 부엌 세간은 남에게 빌리지도 빌려주지도 않았다.
송광사 요사채(부엌) 뒤란의 세간들.
떡메와 안반, 절구, 떡살과 다식판, 국수분틀, 맷돌과 풀매, 밀판과 홍두깨, 시루,
용수(술 거를 때 쓰는 도구), 확독 등은 음식을 만들거나 음식 재료를 이기고 찧던
도구이고, 함지박과 이남박(골이 진 함지박), 자배기, 소래기, 보시기(작은 사발),
뚝배기, 바가지, 뒤웅박, 물동이, 물지게 등은 음식이나 물을 담거나 나르던 도구이
며, 똬리, 맷방석, 메주틀, 석쇠, 시루밑, 체, 풀무, 삼발이, 부젓가락, 고무레, 채
독(싸릿가지 등으로 만든 뒤주) 등도 부엌에서 흔히 사용했던 도구들이다.
영주 무섬리에서 만난 이정호 할머니가 부엌문을 열고 뒤란으로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