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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속과 문화.전통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by joolychoi 2015. 1. 5.

 

 

 

 

 
 
  경주 최부자댁 구경하기  

 

   

  경주 최 부자의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는 버금감- 둔차(鈍次)

 

 

부불3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아주 가끔 내가 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목표에 미달 되었을 때,

또는 남과 비교하여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내 스스로를 위안하고자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詩)를

떠 올린다. 글귀 하나하나 상세히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 좋으면 되었지 정자(亭子)까지

좋을 수야 있나?" 하며 위안을 삼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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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소(獨笑, 홀로 웃다 ) / 정약용(丁若鏞)

             

            有粟無人食 ( 유율무인식 )

            양식 많은 집엔 자식이 귀하고

             

            多男必患飢 ( 다남필환기 )

            아들 많은 집엔 굶주림이 있으며,

             

            達官必창愚 ( 달관필창우 )

            높은 벼슬아치는 꼭 멍청하고

            * 창(春-日+臼+心)

             

            才者無所施 ( 재자무소시 )

            재주있는 인재는 재주 펼 길 없으며,

             

            家室少完福 (가실소완복 )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至道常陵遲 ( 지도상릉지 )

            지극한 도는 늘상 쇠퇴하기 마련이며,

             

            翁嗇子每蕩 ( 옹색자매탕 )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은 방탕하고

             

            婦慧郎必癡 ( 부혜랑필치 )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며,

             

            月滿頻値雲 ( 월만빈치운 )

            보름달 뜨면 구름 자주 끼고

            花開風誤之 ( 화개풍오지 )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物物盡如此 ( 물물진여차 )

            세상 일이란 모두 이런 거야

             

            獨笑無人知 ( 독소무인지 )

            나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을걸.

             

              경주 최 부자란 제목에 왠 사설이냐 하겠지만,

              이 집안 역시 가실소완복(家室少完福 )이란 말처럼

              완전한 복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것이다.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였고 과거에 낙방하는 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온 연유는 무엇일까?

               

              잘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하는가?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경주 최 부자 집안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중 기억에 남는 것이 인상적인 그 집안의

              가훈(家訓)이었다.집안을 다스리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

              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修身)의 가훈 '육연'(六然)이 그것이다

               

              '육훈(六訓)'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 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내가 경주에 머무른지 2달여 동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자처초연:自處超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 (대인애연:對人靄然),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유사감연:有事敢然),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득의담연:得意淡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다.

              안 틈틈이 몇 곳을둘러보면서도 최 부잣집을 방문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햇살 고운 5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길을 나섰다.

              일반적으로 " 경주 최 부잣집"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대로

              경주 교동에 소재해 있는 "교촌댁"을 일컫는다.

              그러나 최 부잣집의 집안 내력을 사전에 인지하게 되면,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위치한 "충의당(忠義堂)"을

              먼저 찾아가는 일에 망설임이 없다.

               

              경주 최 부자는 최치원의 17세 손인 최진립과

              그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재경 최국선으로부터

              28세 손인 문파 최준에 이르는 10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일컫는 말이다.

              엄청난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 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은 바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장군이다.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그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전선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순국하니 그의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평소의 생활도 청렴하였던 최진립은 이렇듯

              일생을 장렬하게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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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구역으로 울산광역시 두서면 활천리에 서 있는 경주최씨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묘지안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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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 소재해 있는 최 부잣집의 파시조

              (派始祖) 최진립이 살았던 "충의당(忠義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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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당(忠義堂)" 의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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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앞에는 장군의 6대조인 사성공(司成公) 최예(崔汭)의 사당 표지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물 한 점이 출토 되어 놓여 있다. 이곳이 사당이 있었다는

              사실과 아들 3형제의 이름자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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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랑채에 걸려있는 멋진 글씨의 현판과 안뜰에 둘러쳐진 담장.현판의 글은

              중용(中庸)의 신사명변(愼思明辨)을 인용하였다.;-"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판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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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와담 사이의 문양들. 귀면(鬼面),천년(千年)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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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의당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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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교동의 최 부잣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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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과 행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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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여명의 식객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다는 경주 최부자 집의 사랑채.

              본래 최 부자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1970년에 화재로 소실된 사

              랑채는 근래에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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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에 걸려있는 현판.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조부(祖父)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퇴계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유필(儒筆)의 품격(品格)이

              드러난 용암고택(龍庵古宅)이란 현판글씨는 최진립장군의

              14대 종손이며 높은 품위와 의 가풍을 잇는 21세기

              선비인 충의당(忠義堂) 주인 최채량(崔採亮)의 글씨다.

              최채량(崔採亮)의 아호 역시 '어리석은 산(愚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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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의 소유로 되어있다.둔차(鈍次)........

              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 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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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리 고개를 이야기하던 시절 쌀밥 한 번 실컷 먹어보고

              죽고 싶다던 시절에 쌀이란 백성들에게 하늘이었다.

              '좋은 일을 한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

              (積善之家 必有餘慶)는 표본인 800석이 들어간다는

              최 부잣집 곳간.이런 곳간이 7채가 있었다고 한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 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 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리라면 동(東)으로 동해바다를

              접하는 감포일대, 서(西)로 영천,남(南)으로 울산,북(北)으로는

              포항을 포함하는 광대한 면적이다.이렇듯 최 부잣집은

              한 해에 소비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은 과객의

              대접에, 나머지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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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 부잣집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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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법주의 담장길........ 최 부자집과 담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주(家酒)를 빚는 교동법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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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구경을 해도 되겠느냐는 나에게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는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계시는 분께 "둔차(鈍次)"의 의미를 물었더니

              "겸손을 나타내는 의미" 라며 답하신다. 이 집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이신지 묻고 싶었으나 워낙 열중이시라 방해를 드리는 것 같아

              그 질 문은 드리지 못하고 인사만 나누고 돌아섰다.

              아마도 집안의 관리를 맡아 하시는 분일 성 싶다.

               

              현재 최 부잣집은 영남대학교 의 소유로 되어있다.

              둔차(鈍次)...다음은 전진문 교수의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 에 있는 "둔차(鈍次)"의 설명이다. 1등보다는 2등’,

              ‘어리석은 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은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1등주의’가 팽배해 있다.

              특히 국경 없는 글로벌 시대에는‘ 세계 1등’만이 시장을 선점하고

              우뚝 설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뿐이다.

              1등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 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그에 비해 2등은

              이러한 것들을 적게 받기에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1등이 못되어도 만족하라’는 의미다.

              이것은 최씨 가문에서 추구하는 적정 만족의 원리와 상통한다.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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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동법주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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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최부자 최준(崔浚)은 호(號)가 문파(汶坡)다.호(號)는 의친왕 이강이 이 집에
              며칠 머물면서 지어준 것이라한다.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47년에는 대구에 대구대학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으로서 현대교육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독립운동 사실이 왜경에게 발각되어 만석꾼 재산을 거의 날려버린
              최준은 남은 전 재산과 살고 있던 경주 및 대구의 집까지 처분하여 대구대학과
              계림학숙을 세웠는데 이 두 학교가 합해져서 후일 영남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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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최 부잣집 자손들은 옛날 만큼의 부(富)를 가지고 있지않다.최 부잣집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걸려있는 한정식집 '요석궁' 의 플랭카드는 보는
              이에 따라 많은 생각을 갖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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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식집 " 요석궁 "우측 길 끝 너머가 경주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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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최부자 최준의 자형이 국내 항일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독립운동가 (固軒)박상진(朴尙鎭)이다.그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결사대인 대한 광복회를 조직,총사령관으로써

              주권회복 및 광복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전개 하였다.

              김좌진 장군이 그의 휘하인 부사령에 있기도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박상진은 결국 3년6개월의 옥살이 끝에

              1921년 대구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돼 37살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 교동 최 부잣집을 다녀온 며칠 후 이른 아침에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묘소는 경주 내남면에서 외동읍

              사이를 잇는 도로를 약 2km 따라가다가 우측에 서 있는

              "울산청년회" 에서 세운 안내간판을 따라 농로와 산길을

              500m쯤오르면 참나무와 소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 있다.

               

              박상진의사의 묘소를 참배하고 내려오면서 최 부잣집 구성원

              당사자들은 물론 그들과 인연이 된 사람들도 사회 지도층으로서

              지켜나갈 도덕적,사회적 책임을 다 했음은 물론 구국의

              영웅으로서의 역활도 높이 평가받고 추앙되어야 함에

              인색함이 없어야 될 것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최 부잣집의 금언(金言)을 되 뇌어 본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옮 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