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강씨는 대우그룹에서
김우중 회장의 연설문 담당자로 일하다가 그룹이 해체된
2000년 김대중 전(前) 대통령의 연설문 담당 행정관(4급)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5년)을 포함해
8년간 대통령 연설문 담당으로 일한 ‘대통령 연설문 전문가’입니다.
2008년 효성그룹 회장실 상무로 일하다가 벤처기업
임원을 거쳐최근 한 출판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그가
체험한 대통령들의 연설문 준비 스타일은 어땠을까요?
‘선생님’처럼 세밀하게 수정지시한 김대중, 현장 애드립 좋아한 노무현
먼저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연설문 담당자들은 원고를 쓸 때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김 전대통령이 ‘선생님’처럼
원고에 수정사항을 빽빽하게 메모해 비서들에게 돌려보냈기
때문이랍니다.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고 그 옆에
‘일본식 표현이니 앞으로는 사용하지 마세요’라고
채점하듯 써서 원고를 내려보냈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원고에 하얀 여백이 거의 안 남아 있을 정도로 빽빽하게
수정된 원고가 돌아오기도 했답니다. 수정할 내용이 많아서
더 쓸 공간이 없으면 아예 녹음을 해서 카세트 테이프를
연설문 담당 비서들에게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면 연설문 담당
비서들은 그 테이프를 틀어놓고 그대로 원고를 작성해 연설문을
썼다고 합니다. 강 전 비서관은 “고생해서 원고 초안을 보냈는데
테이프가 돌아오면 허탈하기도 하고 대통령의 바쁜 시간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밤 10시에 회의를 열어서 연설문을 다시
쓰자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날은 꼬박 밤샘을
해야 하지요. 대통령이 직접 밤을 새며 연설문을 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날 오전 10시에 행사가 있는 날이었는데,
바로 12시간 전인 전날 밤 10시에 관저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연설문이 완전히 바뀔 판이었는데 노 전 대통령이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날 온 사무실은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스탭들이
분야별로 나눠 연설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쓰고 있을 때 새벽
3시쯤 전화가 왔답니다. 노 전 대통령이었죠.
“잘 되어가고 있나요?”,
“지금부터 내가 할테니까 다들 눈 좀 붙이세요.
지금까지 쓴 것을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즉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날 새벽 연설 담당 참모들이 잠시 눈을 붙일까말까 쉬고 있는데,
새벽 5~6시쯤 다시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내가 좀 써서 다시
보냈어요. 그런데 아직 마무리를 못했어요. 뒤를 좀 부탁합니다.
” 강 전 비서관이 메일함을 열어보니 연설문 원고가 마무리가 됐고
뒷부분 인사말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현장 ‘애드립’으로 참모들을 애먹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해인가 3·1절 연설에서 노 전 대통령이 일본을
비판했는데, 이는 원래 연설문 원고와 달랐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5년 동안 3·1절 연설에서 한일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노 전 대통령는 연설문에 없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이름까지 거론했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오래된
외교 관례를 깬 것이었지요. 이 일로 강 전 비서관은
민정비서관실의 조사를 받고 경위서까지 냈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청중에 대한 예의”라며, 항상 미리 준비한
원고대로만 연설한 반면, 노 전 대통령은 현장 분위기가 좋을 때나
앞서했던 발언자의 연설 내용과 자신이 준비한 말이 겹칠 때,
즉석에서 생각난 아이템이 있을 경우 어김없이
즉석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표현이나 문장을 두번 쓰는 것을
유독 싫어해 기업도시나 혁신도시 기공식에 참석할 때마다
다른 원고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전국 대도시마다 축구경기장을 완공할 때,
기념 연설을 했는데, 도시가 바뀌어도 원고
주요 내용은 똑같았다고 합니다.
세부 표현보다 큰 틀 중시한 김영삼, 원고를 통째로 거의 외운 노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