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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내 (Gaenea)
감동을 주는 글

가난한 자와 함께한 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2]

by joolychoi 201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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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자와 함께한 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2] 
 
 

절대빈곤시절의 ‘천막 무료 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의료조합‘ 까지, 그것은 그의 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 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의사가 된 날부터 지금까지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 책임감을 잊어버린 날은

없었다. 이 결심을 잊지 않고 살면 나의 생애는 성공이요

이 생각을 잊고 살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평생 가난한 환자들의 친구였던 성산 장기

 

한평생 가난한 환자들의 친구였던 성산 장기려 박사

(1911∼1995)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장기려가 성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성자는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장 박사는 우리 시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럼에도 정작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려 박사(1911∼1995)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 '작은 예수',  한국의 슈바이처,허준,  바보 의사… ' 그의 별명은 수없이 많다.

가난한 환자의 치료비를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내주기도 했으며 입원비 낼

여력이 없는 환자를 몰래 도망치게 해준 이. 며느리가 혼수로 해온 이불을

춥고 배고픈 고학생에게 건넨 의사. 형편이 어려운 환자의 마음까지 어루만진

사랑의 의사였던 셈이다. 상상을 넘어서는 무욕의 생활은 때론 그를 바보로

만들기도 했다. 생전에 그는 "나는 간디에 비하면 너무 가진 게 많다" 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의 호 거룩한 산 (성산)' 조차 그의 아름다웠던

삶을 담기에는 부족한지 모른다.

 

 

장기려 박사님에 대한 글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는 공동체 만들기(소금과 빛에서...)
 

 

삶 전체를 지배했던 강고(强固)한 신앙, 이것이 장기려 박사의

신앙적 깊이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이타적인 신앙과 삶 이면에 있는 신학적 사유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장 박사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면,

그가 초대 교회 공동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있다.김교신 선생이 꾸리는 집회에 참석했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만난 함석헌 선생과는 평생 친분을 맺었다. 이는 장기려

박사가김교신과 함석헌의 신학적 사유에 깊은 공감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산은 무교회주의자들인 두 사람과는 달리,
교회에 적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경성의전에서 배우고 연구하는
동안에는 명륜중앙교회에 나갔는데, 그는 찬양대 대장이었고
아내는 피아노 반주를 맡았었다. 해방 후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
각기 이민족의 간섭을 받자, 성산은 더욱 견고한 신앙생활로
혼란기를 헤쳐 나가고자 했다. 그는 일제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평양 산정현교회를 택했다. 그런 교회야말로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이 세상 정치와 타협하지 않을 올바른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부산에서의 산정현교회 재건에 도 참여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비록 병원일지라도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구현코자 했다. 복음병원 시절, 밀려드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다 보면 병원 식구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곤 했다. 때마침 미국의

개혁선교회에서 병원 운영비로 지원금을 보내오자, 이를 나누는 성산의

방법은 상식을 초월했다. 돈을 직급에 따라 분배하지 않고 직원의

부양가족 숫자에 따라 나눈 것이다. 그 결과 원장 장기려의 월급은

운전기사의 것과 동일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생활 방식을 본뜬 것이었다.

 

초대 교회야말로 장기려 박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다.

성산에게 있어 교회는,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결단을 내리며 가난하고

아픈 이웃들을 위한 헌신 속에서 성도와의 교제를 나누는 공동체여야 했다.

그는 재건한 산정현교회를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 교회로 만들었다.

아들 장가용 교수에 따르면, 그가 말년에 참여했던 공동체는 이름마저도

갖기를 거부했던 작은 모임이었다.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단체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성산은 특정 교파에 구속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참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다. 비록 1949년에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지만 자신의 신앙 태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참 아름다운 인물 장기려 박사님의 사랑에 대하여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 장기려 박사.그분은 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치료한 분이셨습니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북조선의 제1호 의학박사였고,

이산가족으로 전쟁의 아픔을 평생 안고 사신 분입니다.

1986년 박사님은 국제회의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북녘의 가족 소식을 듣습니다. 장남인 장택용씨가 약학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박사님은 정부로부터 북한 방문을

제안 받았습니다. 1985년 9월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이 서울과 평양을 오갈 때였습니다. 그때 박사님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뒤에 박사님이 제안을 거절하신

이유들이 몇몇 지인들로부터 들렸습니다.

 

"나는 매일 영적으로 아내와 교통하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며칠 만나고 오는 것이 내 나이에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내가 평양에 간다면 그곳에서 내 생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살 수 있든지 아니면 내가 아내를 데리고 남쪽에서 살 수 있든지

, 둘 중 하나라면 평양에 가겠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사람이 저 혼자이겠습니까?

저만 그런 특혜를 받을 수야 없지요."

 

그리고 1995년의 성탄절, 세상을 떠나기 전 박사님은

아내 김봉숙씨에게 전해달라며 마지막 말씀을 남겼습니다.

"떠날 때 두고 온 2남3녀의 자식들을 잘 키워준 것에

고마움을 보내며 이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만남을 기약한다."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6월입니다.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장기려 박사님의 삶은

그래서 오늘에도 희망입니다. 오늘 박사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당신의 사랑이 가족애에 머물지 않고,

민족애에만도 머물지 않고,

그 너머에 있을 희망을 길어오기 때문입니다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장기려 박사

상패까지 팔아 가난한 이웃 위해 봉사한 참된 의사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남한에선 처음으로 부산에 무료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 병원에 일하면서 집 한 칸이 없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보다 못한 병원에서 방 한 칸을 마련해 줬습니다.

생전에 막사이상 등을 받았지만 선생은 상금은 물론 상패마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인류애를 실천한 참다운 의사였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남한을 공격해 왔습니다.

서울은 물론 낙동강까지 점령했던 북한군은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밀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까지 점령당했습니다.

“쌔액!”, “쿵~쾅!”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병원 의사들은 깜짝 놀라 모두 피해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장기려 박사가 의사들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의사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저 밖을 보시오…….” 창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장기려 박사와 동료 의사들은 7 개

수술실에서 49 건의 중요한 수술을 했습니다. 국군과 유엔이 평양에

입성하자 이번에는 국군 장병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끼어들면서 유엔군과 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사님, 다친 국군을 도와 줬으니 북한군이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해 준 게 어찌 죄가 된단 말인가?”

“박사님,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제가 평양역으로 차를 가지고 가겠습니다.”

 

장기려는 둘째 아들 기용과 평양역으로 나가 군의관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린 지 4 시간 후 구급차 한 대가 급하게 섰습니다.

이 자동차를 급히 몰아 집으로 가 봤지만 나머지 가족은

이미 피난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가족을 못 만난 채 평양 종로 앞을 지날 때 둘째 아들 기용이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예요. 어머니!”

기용은 목이 터져라 어머니를 불렀지만 차를 세울 수는 없었습니다.

 

수많은 피난민 행렬 속에서 차를 세웠다간 큰일을 겪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용아! 그만 울음을 그쳐라. 곧 만나게 될 게다.”

그러나 장기려 박사는 이때 본 아내와 자식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가족들은 대동강을 못 건너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 부산서도 오직 치료에만 전념

 

부산으로 내려온 박사는 육군 병원에서 숱한 병사들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에서 알고 지내던 한상동 목사 등이 찾아와

5000 달러를 내놓았습니다. 이 돈으로 1951년 6월 20일,

민간인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비록 천막 병원이었지만 피난지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가 하루에 200여명씩 찾아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선생은 ‘의료보험조합’과 ‘청십자병’을 세웠습니다.

어느 날 환자 한 사람이 원장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습니다.

“원장님, 지금 돈이 없어 퇴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퇴원해 돈을 벌면 반드시 치료비를 갚겠습니다.”

 

“사정이 딱하군요. 제가 몰래 밤에 문을 열어 줄 테니 도망치세요.

발각되면 나도 사정이 곤란하니…….”

 

원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 사내에게 교통비로 지폐 한 장을 쥐어 주었습니다.

 

박사는 이처럼 남한 최고의 의사가 되었지만 결코 부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가진 게 너무 많다.’며 늘 자신의 것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며 살았습니다.

1985년 9월, 장기려는 분단 40 년 만에 ‘남북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있는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산가족이 나 하나뿐이 아닌데 그럴 순 없소.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겠소.

나를 이번 고향 방문단에서 빼 주시오.”

박사라고 어찌 가족이 그립지 않았겠어요?

하지만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던

장기려 박사는 그런 혜택을 받지 않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이렇듯 젊은 시절 ‘경성의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의사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죽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첫 결심을 잊지 않고 살았던 참된 의사였습니다.

 

<장기려 연보>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남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 전신) 수석 졸업

일본 나고야대 의학박사

평양연합기독병원장, 김일성대학 의대 교수

부산복음병원 초대 원장, 청십자의원장, 부산 아동병원장 역임

부산대 가톨릭대 서울대 등에서 후학 양성

국내 최초로 '간의 부분절제 및 대량절제술' 성공

부산 외과학회 창립,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병원

국내 첫 건강보험협동조합 '청십자의료보험'창설

1945년 평양도립병원 원장을 지냄

1950년 둘째 아들 기용과 부산으로 피난, 제3육군병원 근무.

1951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료 병원 복음병원 세움

195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됨

1975년 청십자병원을 설립하고 원장 지냄

1979년 막사이사이(사회봉사상)상 받음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세상을 떠나 모란공원에 잠듦

-김남석(작가)-

 
 

 

복음병원 옥탑방. 장기려 박사가 머물던 방과 친필 휘호


--< 좋은 글 >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