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사석원(史奭源·53)은 야행성이다.
예술가가 낮에 쉬고 밤 활동을 만끽하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믿기 어려운 대목은 그 다음에 있다.
화실에서 작업하다 새벽 3시에 귀가하건 친구들과 술을 먹고
새벽 5시에 들어가건, 들어가는 그 시간에 밥을 먹는다.
잠 많은 아내지만, 그때마다 벌떡 일어나 상을 차린다.
그것도 대충 차린 소반(蔬飯)이 아니라 늘 10첩 반상.
대한민국 평범한 남편의 질투와 아내들의 분노를 부르는,
가장 사석원의 20년 넘은 습관이다.
스물넷이던 1984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을 받으며
데뷔한 이 한국화가는, 분방한 붓 못지않게 맛깔나는 글로도
이름난 작가. 맛집 기행이자 서울 풍속 기행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석원의 서울연가'(샘터)가 이 '유쾌하고 뻔뻔한 한량'을
만난 계기였지만, 음주가무에서 시작한 대화는 특유의
가족론과 행복론으로 확장됐다.
―이런 남편은 이제 멸종한 줄 알았다.
잠든 아내를 깨워 술상을 차리게 하다니.
"표현을 정정하자. 강압은 없다. 자발적이다.
내가 장가를 잘 갔나 보다. 그런데 나는 밥을 부엌이나
식탁에 앉아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럼 10첩 반상은 어디에서.
"침대에서.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일종의 평상이다.
오래된 나무를 뜯어서 만든 건데, 네 사람이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그 침대 앞에 TV가 있다. 새벽녘에 천천히
술과 밥을 먹으면서 TV를 보는 것.
내게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다."
우스갯소리로, 전생(前生)에 나라라도 구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먹는 동안 집사람은 옆에서 자다가, 다 먹은 것 같으면
벌떡 일어나서 치우러 간다"라는 말까지 했으니까.
그러다 그의 집 가훈(家訓) 이야기를 들었다. 장식장처럼
생긴 찬장에 총천연색 물감으로 직접 썼다는 가훈은,
'같이 밥 먹자'.
―가훈이 '같이 밥 먹자'?
"식구(食口)의 의미가 같이 밥 먹는 사람 아니냐.
내가 그 침대 겸 평상에서 밥을 먹을 때, 아이들(대학생 딸,
고등학생 아들)도 와서 거든다. 적어도 하루 한두 끼는
네 식구가 함께 밥과 술을 먹는다. 그게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난 아이들 키우면서 단 한 가지 빼놓고는 뭘 '해라,
하지 마라'는 게 전혀 없다."
―그 단 한 가지는 뭐길래.
"해외 유학은 절대 안 된다는 것. 만약 아이가 유학가서
눌러앉으면 그게 동포지 자식이겠는가(웃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뛰어난 재주가 있고, 본인이 노력해서 가는 건 아비로서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유학은 아닌 것 같다.
자식이라면 자주는 못 와도 부르면 와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씩 하고…. 이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내가 너무 이기적인가?"
이 대목에서 '심야의 10첩 반상'만큼이나 좋아한다는
그의 여행 이야기를 물었다. 역시 그의 '이기적'
가족 사랑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가족과 여행을 다닌다고 들었다.
"난 골프를 치지 않는다. 여행이 더 재미있으니까.
만약 100만원이라는 거금이 생겼다면, 그 돈으로 여행하는 게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재미있는 걸,
가족하고 함께 하겠다는 거다.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철마다
여행을 다녔다. 큰아이 고 3 때도 거르지 않았다.
가족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진학문제보다, 같이 맛있는 걸 먹고,
함께 놀러가서 밤하늘 별을 보고, 그것이 가족 아닌가."
존중받을 만한 세계관이자 대단한 가족 사랑이지만,
'10첩 반상'의 후유증 때문인지 심사가 조금 뒤틀렸다.
두 가지 어깃장을 놓고 싶었다.
출처: waple chosun.com./waple Life
waple Life:현명한 사람들의 선택
현명한사람(Wise People) 회원님께 드리는'와플레터'서비스입니다
와플(Waple)은 현명한 사람(Wise People)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