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천차만별(千差萬別)이다. 또한, 살아갈 생계 수단으로
생각해오는 생업 역시 천태만상(千態萬象)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국민이 직업으로 여기며 선호해온 직종이
몇가지 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점차 멀고 먼 나라들로
인식해 오던 지구촌 세계 여러 나라가 마음먹기에 따라선
일일생활권 속으로 들어오고 사회가 점차 산업화 시대로
바꿔감으로 직업도 다양화 되어 지금은 손대지 않고도
코 풀 수 있을 만큼 편리한 시대에 사는 나를 본다.
그런데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그리 편치 못함을
고백한다.이런 마음은 날이 갈수록 무게를 더해가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모님 시대에 지지리 고생만 하다
가신 조상님들에 향한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 때문일 게다.
용돈을 벌려고 껌이나 피로 회복제를 팔러 다니던 모습
내 어릴 적 먹고살기 힘이 겨워 한 푼이라도 벌어 생계에
보태겠다는 일념으로 그 추운 겨울 혹한을 무릅쓰고 새벽
칼바람을 맞으며 시린 손 어찌할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한 구두닦기 소년이 문득 떠오른다.그 소년은 당시 나이라야
불과 열한 살,소년의 아버지는 못 먹어 영양실조가 원인인
폐결핵으로 이년 전에 못내 잊지 못할 가족들을 남겨두고
세상과 이별을 하셨고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화병으로
병석에 누워 벌이를 못하게 되자 삼남 일녀 중 장남인
흔히 볼 수있었던 개천가의 움막들
소년이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자청하여 구두통을 매고
거리로 나섰다는 것이었다.그 당시 불우한 가정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이 학업을 목적으로 어려운 가정형편을 조금이나마
도울 목적으로 손쉽게 선택하는 일에 슈샨보이 구두닦기였고
구두통을 매고 나오는 아이들의 나이 층이 보통 열대여섯
정도였는데 철민이라는 그 아이는 구두통을 매고
거리를 떠돌기는 어린 나이인 열한 살이었다.
1970년대 후반 구두딲이 소년들
철민이는 여러 해 구두통을 매고 거리를 헤매온 나이 많은
아이들로 부터 텃새의 매를 숱하게 맞으면서도 절대 굴하지
않던 무척 똘똘하고 영특한 아이였다.보통 구두닦기 소년들이
일 나오는 시간은 보통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인 아침 7시
전후였으나 유독 철민이 만큼은 새벽 6시경이면 벌써
구두통을 맨 채 “구두닦! 신닦! 약칠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새벽을 흔들어 깨우고 다녔다.
그 모습이 얼마나 당차고 날렵했던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숨 쉰다. 우리 어머니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안쓰럽고 기특했으면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어
철민이 일이 없는 틈을 타서 몇 차례 새로 지은
아침밥을 불러 먹이곤 했다.
이 시대에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어찌 구두닦기 소년인 철민이
뿐이었는가 Early Bird, 일찍 일어나는 새가 더 많이 먹는다.
로렐 볼티모어 랭커스터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남보다
아침에 좀 더 일찍 일어나 좀 더 부지런히 뛰면 그만큼 돌아오는
것도 몇 배가 된다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 애도 능히 아는
사실이다. 어린 나이의 철민이 구두닦기를 하던 그 시대엔
전쟁을 치룬지 불과 십여 년 남짓했으므로 철이 다 든
어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철부지 어린아이들도
고생을 보따리로 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절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은 여러 계층이었으나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것은 음력 섣달 한해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에서 설날 새벽이나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난 이후 집집이
복조리를 사서 걸어두곤 하는데 정월 초하루 새벽, 하루의
새벽이자 한 해의 새벽을 깨우는 복조리 장수의 언 목소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섣달 그믐날 밤엔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시던 어머니의 농담 섞인 말씀을 온전히 믿고서
섣달 그믐날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꼴딱 새우는 통에 새해의
첫날인 설날 아침 봄 뜰에 약병아리처럼 꼬박꼬박 졸다
아버지께 차례 지내는데 불경스럽다.적지 않은 꾸중을
듣기도 했으나 그 꾸중이 살을 파고들어 오진 않았다.
복 주머니와 복 조리 어린 시절의 정겹던 그 소리를 못 잊어 요즘도 가끔은 사 먹곤
하지만,어린 시절 철부지 아이의 늦잠자던 영혼의 귀를 자극하던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오직 부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고 접할 수 있는 풍경인데 재첩국 장수
아지매의 구수한 목소리다.
섬진강에서 재첩 채치하는 여인
그 시절 매일 이른 아침인 7시 전후로 어김없이 들려오던
그 소리 “재첩국 사소! 재첩국!”이 소리만 들려온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온 동네 아낙들이 크고 작은 양푼이를 하나씩
들고 나와 재첩국을 사가곤 했는데 못 먹고 못살던 그 시절엔
김치에 시래기 된장찌개 그리고 재첩국만 밥상에 올라오는
날이면 진수성찬을 받은 듯 온 가족의 입이 귀에 걸리곤 했었다.
재첩국 아주머니 모습(재첩국 사이소~!!)
아침을 깨우는 소리가 어디 이뿐이었겠는가 지금이야 대도시인
부산에서 들어보기 어려운 소리 힘든 모습이 되었지만,
그 시절엔 매일 아침이면 습관처럼 접하던 모습이라 어쩌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날이면 어디 아픈가?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하고 한편으로 그들의 안부도 궁금해했던
넉넉하고 따뜻한 시절이었다. 그들은 좋은 말로 각설이라
불렀지만, 흔히들 (걸인) 거지라고 불렀든 걸식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집집이 찾아오는 시간을 보면
시계도 그렇게 정확한 시계가 없었다. 옛말에 시장이 반찬이요
시장이 시간이란 뜻에 걸맞게 그들의 사회에도 질서와
규칙이 있어 걸식하더라도 무분별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 지시에 따라 가정마다 밥을 지어 풀 시간에 찾아가
각설이타령 한 자락 불러주고는 밥 한 그릇 얻어먹는 것이었다.
부부각설이 공연 모습
“얼씨구 시구 들어간다 절씨구 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어허 품바가 잘도 헌다. 헤~” 이런 모습은
단체생활을 하던 걸인들이고 공동생활이 아닌 혼자 뜨내기
걸인들은 독단적으로 움직였는데“밥 좀 주소! 시계 보소!
길로 가다가 서방님이라고 얻은 것이 지랄같이도 생겼네!
밥 돼지가 들었는지 꼴깍꼴깍 넘어가요.”
각설이 공연 모습(시골장터)
이렇듯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부르며 걸식을 하곤 했었는데
이들 또한 그 시절 하루의 아침을 깨웠던 살아 있는 생명의
소리였다. 그들 중에는 보기만 하여도 동정이 가는 이들도
있었다.젊은 나이에 병든 남편에 젖먹이까지 딸렸으니 막일도
못한 채 걸식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같은 처지에서
걸식하던 걸인들에게 까지 업신여김을 당했고 배척을 당했었다.
길거리에 안자 구걸하는 여인 걸인 모습
우리 어머니는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 다른 걸인이 찾아오면
밥 다 먹었다.밥이 없다.라고 따돌린 후 그 여인이 찾아오면
갖은 반찬과 함께 온돌방 아랫목에 묻어놓았던 따뜻한 밥 한
그릇을 챙겨주셨다. 많이 배우고 어느 시대의 여인들보다
똑똑한 요즈음 여인들이 이렇게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 덩달아 모든 가정의 아이들도
이 마음을 닮아 온순한 사회의 강물로 흐르게…
출처:늘 푸른 소나무(松竹 김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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